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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최후

방원은 그가 정도전인줄 알고 김소근등 4인을 시켜 체포해 오게 하니 정도전이 도장밥에 숨어 있었다. 김소근등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치니 정도전이 한 자끔 되는 칼을 가지고 있었으나 걸을 수가 없어 기어 나왔다. 김소근 등이 칼을 버리라고 하자 칼을 버리고 나와서 말하기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한마디 하고 죽게 해 주십시오”했다. 정도전이 방...

제1차 왕자의 난과 이숙번

이들이 출동하려 하자 부인이 준비한 중간이 부러진 철창(鐵槍)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제군(諸君)의 종자(從者)들과 노복(奴僕)들 10여인은 모두 몽둥이를 들었는데 김소근(金小斤)만 칼을 들었다. 방원이 말을 달려 독소(纛所)의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에게 “오늘의 일을 어찌해야 하겠는가?”물으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일이...

제 1차 왕자의 난과 방원 2

이 때 이무(李茂)는 평소 중립을 지킬 계획을 세웠으나 민무질을 따라가 은밀히 남은(南誾)등의 모의를 방원에게 고했다. 이무는 민무질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박포(朴包)도 양 사이를 왕래하면서 저들의 동정을 살폈다. 방원은 민무구를 시켜 이숙번에게 무기를 갖추고 자기집 가까운데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대궐 서랑(西廊)으로...

제 1차 왕자의 난과 방원

방원이 전라도 절제사가 되면서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00호를 방번에게 이관했다. 그런데도 방번은 사양하지도 않았고 태조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돌려주라고도 하지 않았다. 태조는 오히려 “외간의 의논을 너희들은 몰라서는 안 된다. 의당 여러 형제들을 깨우쳐 삼가도록 해야 한다”고 경계했다. 정도전‧남은‧심효생‧이제(李濟)‧이근(李懃)‧장지...

세종 시대에 대한 평가 2

또한 정치적으로 부왕(父王)인 태종이 공신‧외척세력을 제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수립할 기반을 마련했다. 태종은 스스로 창업군주(創業君主)를 자처하고 후계자는 자기의 마스터플랜을 완성할 수성군주(守成君主)를 원하고 있었다. 적장자가 아닌 충녕대군(忠 寧大君)이 적장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제치고 군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정도전에 대한 평가 1

정도전은 조선왕조를 설계한 설계자였으나 방원(芳遠)과의 권력투쟁에 희생되어 죽은 뒤에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정도전은 진(津)‧유(遊)‧영(泳 혹은 澹)‧담(湛)의 네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 유(游)는 정도전이 피살되던 날 함께 피살되었고, 넷째 아들(湛)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 맏아들 진(津)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수군...

세종대 역사의 정체성 확립 4

세종은 또한 태조 이성계의 건국이 천명을 받아 행한 정당한 것임을 천명하고자 했다. 이것은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자면 태조의 무덕(武德)을 자세히 들어낼 필요가 있고, 조상의 음덕이 컸음을 드러내야 한다. 이에『고려사』를 편찬하고 있던 1442년(세종 24) 3월 2일에 세종은 “태조께서 왕이 되기 전에 뛰어난 무덕이 하나 둘이...

세종대 역사의 정체성 확립 3

조선에서는 자국의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고려사뿐만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의 정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402년(태종 2) 6월에 태종은 하륜․권근․이첨 등에게 삼국사를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1403년(태종 3) 6월에 편찬된 『삼국사략』(三國史略)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는 나라의 시조 단군(檀君)과 중국 문화를 처음으로 전파...

제1차 왕자의 란과 정도전 3

한편 정도전이 만약 방원등 이복왕자들을 제거할 생각이 있었다면 철저한 준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대내에 들어갔을 때 불이 꺼져 있기는 했으나 내노(內奴) 갑사(甲士)가 덮치지도 않았고 방원 등이 남은의 첩의 집을 외워 쌀 때도 노복(奴僕) 들이 졸고 있었고 안에서 정도전 등이 담소(談笑)하고 있었다 한다. 큰 일...

제1차 왕자의 란과 정도전 2

한편 태조대의 왕비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밖에 없었다.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니 태조로서는 이미 죽은 향처(鄕妻)보다는 건국에 공로가 많고 살아있는 정비(正妃)인 경처(京妻) 강씨를 정통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석이 세자로 책립되었으며, 그에 대해서 당시에 이의가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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