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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 옹립과 변안열

변안렬은 우왕과 껄끄러운 사이였다. 1383년(우왕9) 9월에 우왕이 전 전공판서(前 典工判書) 왕흥(王興)의 집에 갔을 때 왕흥의 딸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딸은 이미 변안렬의 장자 변현(邊顯)과 정혼한 사이였다. 시중 조민수가 “변안렬은 나라의 명장이요, 그 공이 심히 큰데, 이제 그 며느리가 될 사람을 빼앗으면 장신(將臣)이 누가 실망...

정도전약력

정도전鄭道傳, 1342∼1398년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봉화. 여말선초의 정치가, 학자.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색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시주부, 예조정랑, 지제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전라도 나주에 유배...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2

승진을 거듭하던 정몽주는 두 번째 시련을 맞는다. 우왕 즉위 후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 등에 의해 전개되던 친원적 외교에 반기를 들다가 유배를 당한 것이다. 이듬해 풀려나긴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임무는 일본행이었다. 그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긴 권신들이 그를 추천했다. 당시 일본행은 죽음의 길이었다. 비록 일본 쪽에서 먼저 화친을 청해 보내는...

원의 몰락과 공민왕의 개혁 3

위기를 넘긴 공민왕은 1365년부터 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공민왕이 기용한 인물이 승려 신돈[辛旽 : 승명은 편조(遍照), 돈(旽)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俗名)이며, 왕이 내린 법호로 청한거사(淸閑居士)가 있다]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이유는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1365년 5월에...

조선왕조의 건국과 정도전

정도전은 태조가 즉위한지 11일만인 7월 28일에 왕명을 받아 신왕조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반포했다. 이에 따라 이색(李穡)등 4명의 반혁명분자들은 귀양보내고, 이종학(李種學)‧최을의(崔乙義)‧우호수(禹浩壽)‧우홍득(禹洪得)‧우홍명(禹洪命)‧이숭인(李崇仁)‧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등 8명은 손흥종(孫興宗)‧황거정(...

성리학(性理學)의 수용과 내포 2

이색은 불교는 본래 좋은 것이지만 승려들이 타락하여 피해가 심하니 불교적 윤리관을 유교적 윤리관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다.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고 성균관을 부흥시키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정도전 권근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나 이성계를 추종하는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기타 제자들의 대립으로 말년을 불우하...

성리학(性理學)의 수용과 내포 1

고려말에 내포의 지식인들은 성리학 수용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 성리학을 처음으로 연구 보급한 백이정(白頤正)의 묘소는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그곳에 그를 모신 신안사(新安祠)와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성리학을 수용하는데 정치적으로 앞장선 사람은 안향(安珦)이지만 원나라에 10년간 있으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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