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양반 요약보기전체보기목록닫기

1 2 3

양반의 사상 2

더구나 우암(尤庵)이 북벌론(北伐論)과 주자학 지상주의를 표방한 이후 사상계는 더욱 경직되었다. 불교․노장사상뿐만 아니라 같은 유교라도 양명학(陽明學)이나 주자의 경전해석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되었다. 이는 사상의 유연성을 상실하였음을 뜻한다.실학(實學)은 실로 이러한 노론(老論)의 주자학 지상주의를 배격하는 데서부터 출...

양반의 사상 1

조선시대의 양반은 유교, 특히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였다. 주자학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사대부들의 이데올로기였다. 주자학은 우주론(宇宙論)과 심성론(心性論)을 결합시킨 송나라의 성리학(性理學)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조선의 양반사회는 유교의 도덕적 수양을 중시하였고, 그것을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인륜(人倫)을 통해 실천하고자 하였다. “효는 백행지원(百行...

양반과 사회 2

또한 양반신분을 유지하는 데는 혼인이 중요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족구성은 양측적 친족(兩側的親族)을 바탕으로 부계와 모계가 동시에 중시된 관계였다. 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이었다. 남귀여가혼이란 남자가 혼인하면 여자 집에 들어가 살다가 아이를 낳은 뒤에 본가로 돌아오는 풍습이다. 이것은 오랜 전통으로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이 일찍부터 혼인하...

양반과 사회

조선왕조는 유교의 농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었고, 유교에서는 생산보다 분배에 치중하였다. 이는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고 실리를 도외시해 부국강병에 방해되는 요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모든 권한이 재상에게 집중되었다는 비판이 있어서, 사림정치시대에는 인사권과 언론권이 중하위 양반관료들에게 분할되었다. 전랑(銓郞)이 당하관을 추천할 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

양반과 경제

양반은 지식인이요, 관료요, 지주이기도 하였다. 물론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양반도 있을 수 있으나 양반은 본래 지주였다. 이들은 개간(開墾), 매매(賣買), 사패(賜牌), 기증(寄贈), 투탁(投托), 상속(相續) 등의 방법으로 사유지를 넓혀갔다. 벼슬을 할 경우에는 녹봉(祿俸)과 과전(科田)을 받고, 국가에 공이 있으면 공신전(功臣田), 별사전(別賜田...

양반과 관직

양반들이 공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벼슬을 하기 위해서였다. 젊어서 문(文), 사(史), 철(哲)의 인문지식을 연마해 마흔 살이 되면 벼슬하는 것이 이상이었다. 문과 급제 평균연령이 마흔 살 안팎인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는 공자가 말하는 “사십이사”(四十而仕)와도 걸맞다.그러나 실제로 양반자제들은 10대나 20대부터 벼슬길에 올랐다. 부조(父祖)의 관직...

조선시대의 양반문화

1. 양반과 교육조선시대의 교육은 양반의 전유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시의 교육이라면 유교 교육을 뜻한다.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경전과 문명스러운 삶을 구가하는 시문(詩文), 선험적인 선례인 역사가 유교 교육의 3대 요소였다. 조선시대는 도덕사회였으므로 성인(聖人)의 가르침인 유교경전이 중시되었다. 도덕적 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은 지배자...

양 반

사대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겉은 그럴듯하지만 실행 면에서는 차별이 나게 할 수 있었다. 늘 민본(民本)을 내세워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우선하여 살피고, 흉년이 오면 죽을 쑤어 먹이고,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기 위해 암행어사를 보내는 등 그럴듯한 시책을 내세운다. 이것이 양반 사대부 문화의 속성이다. 지배층으로서 정권을 유지하려면 선정을 베...

조선시대 신분구성과 그 특성

조선의 사회신분은 대체로 양반(兩班), 중인(中人), 양인(良人), 천인(賤人)으로 나눈다.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양반․양인․천인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이상백), 양반과 양인 사이에 중인을, 양인과 천인 사이에 신양역천(身良役賤)을 넣는 사람도 있다(천관우). 더욱 심하게는 조선 초기에는 양인․천인만 있었다는 사람도 있다(한영우).1. 양 반양반이란...

절대왕권을 추구한 임금, 연산군 2

연산군은 왕의 입장에서 대비의 권위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대비도 왕인 자신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할머니이건 어머니이건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연산군에게 3년상이라는 유교 윤리도 왕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현왕후 윤씨는 유교 윤리를 내세워 연산군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