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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5

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4

그가 항상 의기(義氣)로써 사졸을 격려하고, 단속은 비록 엄히 하되, 어루만저 사랑함이 심히 지극하니 군사들이 모두 쓰임을 즐겁게 여기고 감히 발길을 돌리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고을 앞 바다에서 선봉에 서서 고단한 군사로서 적선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격문(檄文)을 손수 써서 여러 고을에 통문(通文)을 내어 돌렸다. “...

변안열의 후예,계축옥사에 말려들다

1613년(광해군 5) 4월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정협(鄭浹)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변응성을 사건에 연루시켜 폐고(廢錮)되어 광주(廣州) 선영 아래 물러나 칩거했다. 변응성이 병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 등의 핍박이 심했던 것이다. 1614년(광해군 6) 봄...

변안열의 후예,국방대책을 내놓다

그리고 1609년(광해군 1) 여름에는 다음과 같은 방어책(防禦策)을 건의했다.  “지금 노적(老賊) · 홀적(忽賊) · 왜적(倭賊) 등 3적이 있는데, 홀적은 장수 24인에 병사 각 500인이 있었으나, 문암(門巖)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6.000이었으니, 지금 만 명이 되지 못 하고, 노적은 누차 홀성(忽城)에 다달아 헛되이...

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2

1594년(선조 27) 여름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전쟁 중이라 경기방어사에 기용되어 복상을 하지 못했다. 난리 통이라 도둑이 성행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마을은 텅 비고 도로는 막혔다. 이에 변응성은 강가에 요충을 감시하고, 둔보(屯堡)를 설치하며,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을 헤아려 유랑민을 모으고, 이들을 안정시키니 동군(東郡)이 편안해졌다. 15...

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1

협의 아들 응성의 자는 기중(機仲)이다. 그는 1552년(명종 7) 3월 29일에 태어나 1616년(광해군 8) 정월 27일에 죽었다. 향년 65세. 어려서부터 총명해 문예가 일찍 성취되어, 약관에 누차 문과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28세에 붓을 던지고 무과에 응시해 1579년(선조 12)에 급제했다. 9년간 선전관, 훈련원 부정 겸 내승(內乘...

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13

그는 43년간 벼슬하는 동안 청렴결백했고, 사재를 모으지 않았으며, 군사를 거느릴 때는 신상필벌(信賞必罰), 관맹득중(寬猛得中)했다. 평소에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었고, 글씨나 바둑 · 거문고 · 매 · 연꽃 · 국화 등 6 가지만 좋아했다. 글씨는 고금(古今)을 증거하고, 바둑은 기축(機軸)을 보는 것이요, 거문고는 소리를 조화하고, 매는 영기(...

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12

1565년(명종 20) 겨울에 아버지가 죽어 날씨를 불구하고 배를 띄우려 하니, 선리(船吏)가 듣지 않았다. 강행했더니 바다 가운데 이르러 과연 태풍을 만나 돛이 부러지고 배가 거의 전복될 뻔 했으나 살아 돌아오니, 사람들이 효심에 감동된 결과라 했다. 복상(服喪)을 마치고 화양(花梁)첨사를 거쳐 경상좌도수사로 옮겼다가 전라병사가 되었는데, 아우가 ...

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11

협(恊)의 자는 자인(子寅)이다. 아버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중추부 경역(經歷, 증영의정을 지낸 계윤(季胤)과 증이조참판, 용성군(龍城君) 최자양(崔子洋)의 딸인 어머니 증정경부인 수원최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528년(중종 23) 10월 22일에 태어나 1590년(선조 23) 9월 5일에 죽었다. 향년 63세. 생부 계윤(季胤)은 원...

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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