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의 분열- 남인과 북인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정여립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 그리고 신묘년의 세자 책봉 논의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잘못처리한 정철을 논의할 때, 정철뿐만 아니라 서인들 모두를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이발인산해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그 범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유성룡김성일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때 강경파를 북인이라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당의 조짐은 이미 그 전부터 있었다. 정여립이 이발을 통해 전랑이 되고자 할 무렵이었다.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이 반역하기 저부터 그 사람됨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벼슬길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정인홍이 이경중을 탄핵했는데, 바로 6년 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에 유성룡은 이경중의 선견지명이 있었음에도 그 당시 대간들에게 반박당해 체직되고 말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런데 유성룡의 그 한 마디가 조정에 파문을 일으켜 이경중 탄핵 당시의 대간이었던 정인홍은 관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와 같은 정인홍과 유성룡의 불화가 남북 분열의 빌미가 되었다.

한편 우성전과 이발의 대립도 남북 분열에 한몫을 했다. 우성전이 부친상을 당해, 이발이 문상을 갔다. 그때 이발은 우성전이 평양에서 데려온 기생첩이 머리를 풀고 며느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래 그 기생은 우성전의 아버지가 함종현령으로 있을 때, 평양을 왕래하다가 알게 된 여인이었다. 그 후 그가 병이 들어 사직하자, 평양감사가 여인을 우성전으로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이발은 아버지가 죽게 되었는데 무슨 마음으로 기생을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며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발은 북악산 아래 살고 있어서 그의 당을 북인이라 불렀고, 우성전은 남산 아래 살아서 그의 두둔하는 이들을 남인이라 했다.

남인인 유성룡 일파에는 김성일 이성중 우성전 등 퇴계 문인이 많았고, 북인인 이발의 일파에는 정여립 최영경 정인홍 등 화담 남명 문인이 많았다. 이억형 같은 경우는 본래 남인이었다. 그러나 북인 이산해의 사위였기 때문에 남 북인을 동시에 출입했는데, 북인이 점점 성해지자 남인으로 돌아섰다.

그러면 동인이 각기 남과 북으로 갈린 원인은 무엇인가? 단지 사사로운 감정 대립이 그 이유였는가? 동인은 그 구성원이 매우 다양했다. 서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결집된 반면, 동인은 서인에게 제외된 다수의 신진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화담 서경덕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황과 조식의 사상적 차이는 제자들 단계에 이르러 표면화되었고, 급기야 중앙 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앙 정계에서 남인으로 지목되던 이들은 주로 퇴계 문인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유성룡 김성일 우성전 이경중 허송(許筬) 김수(金燧) 이광정 정경세(鄭經世) 김우옹 이원익 이덕형 윤승훈(尹承勳)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외의 다른 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시비 분별을 엄격히 하기 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서로 협조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인 세력의 이러한 정치적 인식은 왜란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어 엄정한 시비 분별이 중시되던 분위기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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