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여기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한강 지역에서 사비로 진격하려면 상대적으로 백제 영역을 많이 통과해야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병력 이동상황도 노출되고 중간에 받을 저항도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발상은 전선(戰線)을 형성해서 싸우는 현대전에서나 떠올려 볼 법한 얘기다. 당시는 성(城)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시대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 하나하나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이 많을 리 없다.
그러니 이때의 신라군처럼 마음먹고 동원한 대군이 성을 우회해서 지나가는데, 성에 주둔한 병력이 이 앞을 가로막고 저항하겠다는 발상은 기본적으로 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소수의 병력이 출격하여 유격전 방식으로 괴롭히는 정도다.
하지만 이는 신라군을 ‘귀찮게’하는 정도이지 저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신라군이 이런 정도의 저항이 두려워 북쪽에서 사비로 진군하는 길을 꺼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라군은 지형적인 난점이 적은 북쪽 루트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 루트를 택했다면 지금의 공주 지역을 거쳐 논산 방면으로 들어오게 되며, 굳이 연산을 거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황산벌도 논산 지역일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잘라 말할 수도 없고, 기록도 몇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전투의 양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현지를 둘러보니 기본적인 윤곽은 나온다.
일단 황산벌이 부여에서 그리 먼 지역이 아니다. 무엇보다 백제군이 멀리까지 마중 나가 신라군을 저지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근대에는 중간 중간 이동상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온다 하더라도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길 하나를 골라 정확하게 만나기가 어렵다.
이른바 회전(會戰)이라는 개념도 그래서 나왔다. 오죽했으면 서로 전령을 보내 어느 지점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래 놓지 않으면, 엇갈리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이 굳이 당군과 합류하기 전에 중간에서 굳이 백제군을 만나 싸워주려 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 백제 측에서도 확실하게 신라군의 이동경로를 확인하고 길을 막기 위해서는 사비 부근으로 접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덧글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아 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혼연하~니
언급할 필요도 없는 가정이지만 신라가 남천정에서 탄현을 거치지 않고 곧장 내려왔고 당군이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군산에 상륙했다고 가정하면 더 많은 모순이 발생합니다.
논산과 부여 30리 밖은 바로 코앞인데 9일에 전투가 끝난 신라군이 약속한 10일까지 부여 30리 밖에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그동안 백제 패잔병은 강경으로 가서 배를 타고 웅진구로 이동하여 당군과 전투를 치르고 여기서 승리한 당군은 10일까지 부여 30리 밖에 도착합니다. 신라군은 나무늘보로 구성된 군대인가요?
9일 전투가 끝난 신라군은 10일까지 PT체조를 하다가 가스실에 들어가 가쁜 숨을 고른 뒤 부여 30리 밖까지 낮은 포복으로 갔다...
역학관계상 신라가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기록에도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그분과도 임나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겁니다.
한국에 임나사를 인정하는 학자가 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나중에 만나시거든 '임나경영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봐 주세요.
http://kallery.net/Q_strg/trustle/imna.png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한성을 계속 점유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런 인식이 심어져 있죠.
http://goo.gl/flJ8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