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하지 않았던 전략거점, 강경 └전쟁사

지금의 연산-논산 방면에서 금강 하구인 군산-장항 지역까지의 거리와 보병의 이동속도만 가지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백제군의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계산에 빠져 있는 부분이 있다. 이런 발상은 순전히 보병이 도보로만 이동했다는 전제를 놓고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백제군은 이렇게 짧지 않은 거리를 굳이 도보로만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상륙지점을 현장에서 바꿔버릴 수 있는 당군에 맞서 백제군이 병력을 투입하려면 어차피 배가 필요하다는 점 앞서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황산벌 방면의 부대를 합쳐야 할 상황에 처한 백제가 이 부대를 백강까지 이동시키는 데에도 배를 이용해야 했다는 얘기다.

어차피 배를 이용해야 했다면, 당군의 견제를 받으며 장항지역에 묶여 있던 백제군을 빼내서 군산지역을 옮기기는 여러 가지로 어렵다. 백제군의 대책을 추적해보기 위해서는 일단 백제군이 처한 상황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백제군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병력의 절대 열세다. 게다가 수륙 양면으로 들어오는 적에 대항하려면 가득이나 부족한 병력을 분산시켜 배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해법은 기동성을 살리는 것이다. 즉 한쪽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치른 병력을, 그쪽에서 소모하거나 묶어 놓는 게 아니라 전투가 일단락 되는대로 병력을 빼내 다른 전선으로 돌리는 방법이 있었다는 뜻이다.

황산벌 전투에 투입되었던 백제군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상륙한 당군을 공격해왔던 백제군은 장항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부대가 아니라 황산벌 방면에서 퇴각시켰던 부대일 수 있는 것이다. 병력을 이렇게 운용하면 백제군이 얻을 이점은 많다.

일단 장항 지역에 묶여 있던 백제군은 그저 이 지역에 상륙하려는 당군을 막는데 집중할 수 있다. 황산벌에 투입되었다가 이동하는 백제군 부대가 일종의 예비대 역할을 하며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군산방면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데 쓰여야 했던 배는 황산벌에 투입되었던 백제군 부대를 이동시키는데 쓰면 그만이니 추가적인 부담 같은 것도 없다

.

그렇게 되면 황산벌 방면에 투입되었던 백제군이 다소 먼 거리를 하루 이내에 이동했다는 문제도 해결된다. 황산벌에 투입되었던 백제군 부대는 먼 거리를 도보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황산벌에서 가까운 포구까지 이동한 뒤에 여기 대기시켜놓았던 배를 타고 이동했던 것이다. 도보보다는 배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게 백강까지 갈 수 있으니 먼 거리 이동으로 인한 무리를 줄이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덧글

  • 안시성 2014/12/06 10:16 # 삭제 답글

    백제군처럼 도주 또는 이동 목적으로 배를 준비하고 싸우는것은 비단 고대만의 일이 아니라 현대에도 널리 활용되는데 주로 폭력배들이 다수와 싸울때 자기네들이 패할경우를 대비해 여러대의 차를 준비해놓고는 여차하면 튑니다.패할때만 아니라 경찰들의 단속에 대비한것도 있다고 합니다.
  • 미군철수 2014/12/06 10:21 # 답글

    결사대가 도주로를 확보해 놓고 전장에 나갔다는 이야기는 좀 어색하군요.

    <合兵의 의미>
    백제본기의 기록을 두고 의자왕이 황산벌 패잔병을 웅진구에 투입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於是合兵禦熊津口瀕江屯兵에서 合兵이 바로 전 내용인 황산벌 전투의 패잔병을 합쳤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웅진구의 위치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부여에서 30리 밖보다 더 먼 곳이다.
    (당시 도성은 부여였고 一舎는 군대가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하는데 30리다.)
    또 당군이 부여 30리 밖에서 멈춘 때는 7월 10일로 추정된다.
    이때 멈춘 이유는 전일에 약속한 대로 '7월 10일 백제의 남쪽에서 신라군과 만나기 위해서'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황산벌 전투가 7월 9일에 있었으니 백제 패잔병이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은 굉장히 짧다.
    7월 9일과 10일 사이에, 황산벌 전투가 일어나고 그 전투에서 패한 백제 패잔병이 웅진구로 이동하고 다시 그 패잔병과 당나라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다음 그 전투에서 승리한 당나라 군대가 부여 30리 밖까지 이동하는 일들이 모두 벌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아직 부여 30리 밖까지 도착하지도 못한다.
    네이버 지도를 띄워놓고 금강을 따라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런 조건에 맞는 웅진구의 위치는 없어 보인다.
    애초에 合兵을 황산벌 패잔병과 별개로 생각하면 이런 모순은 말끔히 해소된다.
  • 零丁洋 2014/12/06 14:42 # 답글

    군산이 아니라 강경이 전장이 되면 합리적여 보입니다. 황산벌 방면의 백제군은 지리멸멸 후퇴했을 것이고 그 경로가 부여 쪽이라면 자연스럽게 강경근처에서 수습되어 그 부근 전투에 쉽게 투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만약 실제로 잔여 백제군이 군산까지 이동하여 지원했다면 신라군이 당군 보다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합류지점 부근에서 전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