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각오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경종의 복수와 밀풍군의 추대를 반란의 명분으로 내걸고 왕권 교체를 기도했던 무신란은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무신란을 최초로 보고한 최규서(崔奎瑞)와 토벌군의 사령관 오명항이 모두 소론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오명항은 도순무사를 자청한 인물이다. 소론이 일으킨 반란을 소론이 진압한 셈이었다.

급소(急少)이든 완소(緩少)이든 간에 반란에 자파의 인사가 개입한 이상 소론들은 연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소론 정권이 붕괴될 수 있는 충분한 구실이 되었다. 최규서와 오명항이 토벌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초 조정에서는 오명항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분분했다. 그러나 영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일축했다.

 

오늘의 역변은 당론에서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당론을 말하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처단하겠다.(당의통량』「영조조)

 

자신의 말처럼 무신란은 영조로 하여금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쪽은 소론 · 남인이었지만, 노론도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무신란을 통해 영조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그것은 바로 노론도 소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한 당파만을 전적으로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탕평을 향한 영조의 각오는 이런 과정을 통해 더욱 확고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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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에게 정미환국은 환국이기보다는 탕평의 실현 과정이었다. 영조에게 노론은 탕평의 최대 장애였다. 그들은 영조와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왕의 입장 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추대에 따른 반대 급부만을 줄기차게 요구할 뿐이었다.

택군은 노론에게는 무한한 공로요 집권의 기반이었지만, 영조에게는 감추고 싶은 약점이며 왕권 강화의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왕위를 안겨준 노론이었기에 한동안은 그들과 타협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도를 넘어서자, 영조는 환국을 단행하여 노론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일당 독재를 꿈꾸는 노론과 일당 동재를 막아야 하는 탕평 군주 영조. 양자의 틈바구니에서 권력을 노리는 또 다른 세력인 소론, 이렇게 3자의 입장과 견해는 서로 어긋나 있었지만, 영조는 그 모든 것을 탕평의 테두리에 가두어 두고 싶었다. 그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 나아가 영조 자신을 위하는 유일한 방안아기도 했다. 그러나 노소의 충역시비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왕권도 탕평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1728(영조 4) 3월 무신란이 일어났다. 주모자는 소론·남인의 급진파들이었다. 당시의 집권 세력이던 소론에게는 실로 치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소론에 대한 토역론을 줄기차게 전개한 노론에게는 명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호기가 되었다. 무신란 이후 노론은 공세를 취하고, 소론은 수세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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