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영조는 때로는 왕의 권위를 내세워 위협하는가 하면, 신하들 앞에서 오열하며 인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국은 타개되지 않았다. 국왕의 권위와 눈물도 의리와 명분의 결빙을 녹이지는 못했다.
이 때 노론 영수 민진원이 거취를 걸고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자신을 택하든지, 아니면 이광자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영조는 민진원을 좌의정에서 해임시켰다. 노론의 예봉을 피하고 탕평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대신 홍치중(洪致中)을 등용했다. 민진원이 노론 준론의 영수라면, 홍치중은 노론 완론의 영수였다. 더욱이 홍치중은 소론과의 친교도 깊어 탕평의 대변자로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한동안 홍치중은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능란한 정치술을 발휘하여 유봉휘·이광좌·조억에 대한 노론의 집요한 단죄 요구를 적절히 무마시켰다. 그리고 송진명(宋眞明) ․ 윤순(尹淳) ․ 조익명(趙翼命)등 소론의 등용을 청하는 등 탕평 본래의 취지인 노소병용(老少竝用)을 구현하는 데 노력했다. 영조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조는 홍치중이 바라는 일은 뭐든지 들어주었으며, 탕평을 위해서는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탕평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영조와 홍치중의 ‘합작정치’를 바라보는 노론(준론)은 다급해졌다. 노소병용이 심화될수록 소론에 대한 일망타진 기회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의 정략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들의 손으로 정계를 개편하여 의리와 명분을 재천명하고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영조 ․ 홍치중의 합작정치는 노론에게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 때 국가의 중대사 외에는 일체 불간섭을 고수하던 정호가 입을 열었다. “눈치나 살피면서 이록을 탐내는 구차한 무리!” 정호의 말은 이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홍치중에게는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조택(金祖澤)이 정호와 같은 말로 우의정 조도빈을 공격하자, 홍치중 내각의 존립 명분이 위태로워졌다.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대간을 문책하고 정호를 영의정에서 해임했지만, 진정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영조가 홍치중을 좌의정에 재기용하고 이의현(李宜顯)을 우의정에 임명하여 완론을 보강해 주었지만, 홍치중은 이미 준론의 위세에 눌려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1727년 4월, 유봉휘가 적소에서 사망했다. 이때를 틈타서 노론 준론들은 유봉휘의 재산 적몰과 김일경 일파의 처단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홍치중에게는 사태를 수습할 용기와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한 영조는 노론과의 석연찮은 타협보다는 차라리 소론을 선택했다. 결과는 환국이었다.
이처럼 노론에 대한 실망과 염증은 정미환국으로 표출되어, 정권은 다시 소론의 수중에 들어갔다. 유봉휘 ․ 조태구 ․ 최석항의 관작이 회복되고, 유배된 60여 명의 소론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석방·등용되었다. 노소의 정국 변동은 충역시비의 재조정을 수반했다. 을사처분의 내용은 완전히 백지화 되었다. 이제 노론4대신은 ‘4충’이 아니라 ‘4역’이며, 임인옥사는 극악한 역옥으로 규정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충역과 권력의 함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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