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5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이에 앞서 관찰사 이광(李洸)이 변응정이 바다에서 승전한 공을 나라에 알리자 선조가 그를 전라수사로 임명했으나 길이 막혀 전하지 못해 그가 알지 못한 채 죽었다. 난리가 점점 평정되어 가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조헌(趙憲) · 고경명(高敬命) · 변응정(邊應井)은 다 충의가 뛰어난 분들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그 처자들을 구제하고 그 충혼(忠魂)을 위로해 사기를 격려함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상언해 변응정에게는 병조참판의 증직과 정문(旌門)이 내려지고, 자손을 녹용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또한 금산(錦山)의 선비들이 조헌 ·고경명 · 변응정을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했다. 또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징비록(懲毖錄)에서 적의 정예병이 다 웅령(熊嶺) 전투에서 패함으로서 전라 일도가 온전함을 얻어 중흥의 기초를 세운 공적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변응정은 문장에 능하고 시도 잘 지었다. 그 약간편이 세상에 전하는데, 논평하는 사람들이골격(骨格)이 개장(開張)함이 그 위인과 같다고 했다. 또한 두 아우에게 보낸 서찰이 다행히 보존되어 있는데, 사의(辭意)가 비장(悲壯)함이 추상열일(秋霜烈日)과 같고, 필세(筆勢)가 굳세어 지금 보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로서 가히 그의 기상의 일단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효성이 지극해 집에는 항아리와 그릇도 없으면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떨어트리지 않았고, 병이 나면 근심이 얼굴에 가득하고,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니, 곁에 있는 사람이 감동해 고인(古人)이 이른바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맞다고 믿도록 했다.

1393(선조 26)에 연신(筵臣) 김진규(金鎭圭)가 변응정의 사적을 들어 표장할 것을 아뢰니, 선조는 수립(樹立)이 탁이(卓異)하고 충절이 가상하도다. 마땅히 정경(正卿)의 증직을 더하고 특히 시호(諡號)를 내리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에 예조는 난리를 당해 승첩(勝捷)하고,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의리에 순절했다고 했다. 선조는 드디어 그에게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와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지훈련원사의 증직을 내렸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그의 무덤을 의총(義塚)이라 하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묘표를 지어 萬世不死라 했고, 의단(義壇)과 당재(堂齋)의 기()를 지었다. 변응정 청시행장(請諡行狀)은 민진후(閔鎭厚), 가장(家狀)은 변정진(邊挺鎭), 임오충절사적초(壬午忠節事績抄)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변응정전적기(邊應井戰績記)는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 뿐만 아니라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는 경연에서 변응정을 포상할 것을 상주했다. 모두 노론 벌열들이 변응정의 현양을 주창한 것이다. 이는 그의 충의가 의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우암을 비롯한 노론대가들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부인은 현감 오윤경(吳胤慶)의 딸인 정부인 보성(寶城)오씨다. 남편과 함께 묻혔다. 변응정은 금산의 종용당(從容堂)에 배향되어 있는데 이 당은 1646(인조 24)에 창건되어 1663(현종 4)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려 있다. 묘는 양주(楊州) 동면(東面) 금촌(金村) 마산(馬山) 아버지 묘 아래에 간좌(艮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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