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4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그가 항상 의기(義氣)로써 사졸을 격려하고, 단속은 비록 엄히 하되, 어루만저 사랑함이 심히 지극하니 군사들이 모두 쓰임을 즐겁게 여기고 감히 발길을 돌리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고을 앞 바다에서 선봉에 서서 고단한 군사로서 적선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격문(檄文)을 손수 써서 여러 고을에 통문(通文)을 내어 돌렸다.

平義智豊臣秀吉이 병권을 탐해 함께 군사를 일으켜 처 들어 왔다. 땅은 준령(峻嶺)이 이롭고, 천혜의 요충은 장강(長江)인데, 일찍이 20일이 못되어 많은 우리 지방이 적에 손에 들어가고 많은 생령이 적의 칼끝에 죽었으며, 종사(宗社)가 피란길에 오르고, 산하가 피로 물들었으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슬프다! 우리 장수와 사졸들이 차마 하늘을 함께 머리에 이고 있겠는가? 죽을 힘을 다하고, 죽기로 각오함이 바로 오늘에 있음이라. 거가(車駕)가 도성을 떠나고 온 나라가 막혔으니 가속(家屬)들은 어디로 돌아가겠으며, 사생(死生)을 알기 어렵도다! 임금과 어버이를 다 버리고 충효가 둘 다 이그러졌으니, 사는 것이 가히 부끄러운지라. 무슨 낯으로 천지에 대하리오. 동국(東國)에 사람이 없음이니, 후세에 부끄럽기 한이 없다. 이제 들으니 동궁(東宮)이 이미 경기도에 임하시어 군사를 애무(愛撫)해 친히 출정한다 하시니, 신주(神州)를 능히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할 수 있으리라. 국가의 회복이 오로지 호남에 달려 있으니, 금성(金城)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급히 쳐서 승전을 이끌진대 국가의 수치를 가히 씼으리라. 남도의 백성들을 구원한 연후에 의병을 일으켜 즉시 서울로 다달아 천병(天兵)을 성원해 요기(妖氣)를 빨리 소탕하리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요긴한 것이 아니요, 마땅히 우리의 직분이니, 어찌 또한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이 때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권율(權慄) · 조헌과 함께 금성산을 협공할 것을 약속하고 달려갔으나 연락이 잘못되어 조헌군만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뒤였다. 이에 그는 내가 조헌선생과 더불어 약속하고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하늘을 볼 수있겠는가?” 라고 하고 마침내 김제(金堤)군수 정담(鄭湛)과 함께 동맹)(同盟)의 의를 맺고 웅령(熊嶺)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적과 크게 싸워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가 혜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마침 날이 저물자 적들이 아군의 화살이 동이 나고 후원이 끊긴 것을 알고 힘을 다해 공격해 왔다. 응정은 기운을 다해 소리 높여 말하기를 이곳이 우리가 죽어야 할 곳이다라고 하고 병사들과 함께 육박전을 치르다가 마침내 전사하니, 1592(선조 25) 827일이었다. 적들도 그의 죽음을 의롭게 여겨 큰 무덤을 만들어 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標木)을 세워 주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그의 기숙처(寄宿處)를 바라보며 서로 통곡하며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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