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3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응정(應井)의 자는 문숙(文叔)이다. 1557(명종 12) 1027일에 태어나 1592(선조 25) 827일에 전장에서 죽었다. 향년 36. 어려서부터 절조(節操)가 있고 문예(文藝)에 뛰어나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협()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중부도 무과를 권했다. 그리하여 29세에 무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 선조가 일찍이 변협에게 장재(將材)가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자 신의 조카 변응정이 문 · 무에 재주가 있습니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당시 북변이 소란해 조정에서 무과에 응시한 자는 다 파견해 그곳을 수비토록 했는데, 응정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함흥에 이르니, 감사(監司)가 그의 문재(文才)를 사랑해 막하(幕下)에 두고 매양 시문을 칭탄하며 그대의 문예로 만약 유과(儒科: 문과)에 진출했으면 가히 옥당(玉堂)에 발탁될 것이었는데, 활을 짊어지고 전장에 나섰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라고 했다. 그 때 향시(鄕試)가 가까운 읍에서 실시되었는데, 향인(鄕人)들이 앞 다투어 타도에서 응시한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는 시를 지어 다북쑥 떨기 속에 솔나무는 천척(千尺)이요, 까막까치 지저기는 속에 학()의 일성이라고 했더니, 배척하던 자들이 위축되고, 또한 그가 책문(策問) 시험에 장원을 하니, 무인으로서 과장(科場)에서 명예가 대단했다.

1588(선조 21)에 식년무과에 급제해 처음에 월송만호(月松萬戶)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선전관(宣傳官)에 뽑혀 들어갔는데, 행장(行裝)이 담박해 왕래할 때는 칼 한 자루만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집이 가난해 열읍(列邑)의 여러 진영(鎭營)에서 자용(資用)을 도와 청중(廳中)에서 쓰는 장구(裝具)를 갖추어 주었다. 선전관이 된 지 한 달이 못되어 그는 남해(南海)현감으로 내려갔다. 남해안에 왜구가 나타나 조정에서 이를 막을 사람을 뽑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차례를 건너뛰어 제주목사에 천거되었으나 그런 문무전재(文武全才)는 중앙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해 승정원으로 불려 들어갔다.

1592(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민들이 자물쇠를 부수고 관청의 물건을 약탈해 갔다. 그가 주모자를 체포해 목을 베어 거리에 매달으니 경내가 두려워서 조용해졌다. 그는 상소를 올려 적들이 허술한 틈을 타 대마도(對馬島)를 기습해 그들의 수미(首尾)가 서로 내응할 수 없도록 하자고 했다. “곧바로 대양(大梁)으로 내닷는 것은 손빈(孫臏)의 승산(勝算)이고, 먼저 범양(范陽을 취하는 것은 이필(李泌)의 기모(奇謀)입니다라는 말을 식자(識者)들은 기이하게 여겼으나 조정에서는 채택하지 않았다. 그는 종 일력(一力)을 두 아우, 승지 응벽(應璧)과 병사(兵使) 응규(應奎)에게 보내어 당당한 성대(聖代)에 역적의 왜인들이 강성함으로 말미암아 변장(邊將)이 방어하지 못하고, 여러 진영이 연이어 무너지며, 왜적이 도성을 핍박해 왕이 파천(播遷)하게 생겼으니, 신자(臣子)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 들으니 어머니께서 출성했다고 하니 더욱 망극하다. 멀리 해외에 있어 가국(家國)의 화란을 함께 하지 못하니, 천지간에 한 불충이요, 불효다라는 편지를 전하게 했다. 그리고 의복을 벗고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보내면서 내가 난리에 임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죽거든 이로써 장사지내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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