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계축옥사에 말려들다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613(광해군 5) 4월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정협(鄭浹)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변응성을 사건에 연루시켜 폐고(廢錮)되어 광주(廣州) 선영 아래 물러나 칩거했다. 변응성이 병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 등의 핍박이 심했던 것이다.

1614(광해군 6) 봄에 훈련원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왕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1616(광해군 8) 정월 27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 병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그 해 3월 광주(廣州) 용진리(龍津里) 운길산(雲吉山)에 건좌(乾坐)로 장사지냈다. 행장은 정만석(鄭晩錫), 청시행장(請諡行狀)은 예문제학 민종현(閔鍾顯), 신도비명은 종후손 변시연(邊時淵)이 지었다.

그는 용모가 풍만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천성이 탁월하고, 평소에 마음이 평온했지만 큰일을 당해서는 굳건했다. 관직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손했으나, 권귀(權貴)를 보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난리에 어머니를 잘 모셨다. 군무를 보면서도 정성온청(定省溫淸)의 절차를 조금도 거스르지 않으려 했으며, 아버지가 아플 때는 분뇨(糞尿)를 맛보고 손까락을 베었다. 거상(居喪)에 슬픔으로 살고자 하지 않았으나 국란으로 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본래 검소하고, 청백했으며, 오직 백성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 크고 작은 50 여 차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공을 남에게 미뤘다. 부인은 셋인데, 첫째부인은 지훈련원사 백유검(白惟儉)의 딸 수원백씨이고, 둘째부인은 부사 송율(宋嵂)의 딸 려산송씨이며, 셋째부인은 진사 심대겸(沈大謙)의 딸인 청송심씨다. 아들이 없어 족자(族子) 변득(邊得)을 양자로 들였는데 부사과를 지냈다. 변득은 1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석징(錫徵)이요, 딸들은 사인(士人) 이상신(李相紳) · 유관(兪糸+) · 이성하(李成廈)에게 각각 시집갔다.

()의 아우는 열()이고 열의 아들은 응정(應井) · 응벽(應璧) · 응규(應奎). ()은 무과를 거쳐 음직으로 공조좌랑을 지냈고, 1565(명종 20)에 고성(固城)현령을 지낸 적이 있으며, 죽은 뒤에 아들 응정의 출세로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는 금촌(金村) 마산(馬山) 아버지 산소 아래 간좌(艮坐)로 있다. 부인은 병사 이흔(李昕)의 딸인 철성(鐵城)이씨다. 부인은 품성이 법도가 있어서 과부가 되었을 때 아들 응정을 불러놓고 내가 미망인으로서 이미 세 아들이 있으니, 교훈이 불가불 엄해야 하겠다고 하고는 세 개의 고리()를 주조해 오라고 해 교형(敎刑)의 자료로 삼았다. 그래서 세 아들의 재기(才器)가 성취되어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한다. 석주(石洲) 권필(權鞸)世重二男俱死國 天有一子爲全家라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1600(선조 33)에 죽었다. 묘는 남편과 함께 묻혔는데, 쌍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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