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594(선조 27) 여름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전쟁 중이라 경기방어사에 기용되어 복상을 하지 못했다. 난리 통이라 도둑이 성행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마을은 텅 비고 도로는 막혔다. 이에 변응성은 강가에 요충을 감시하고, 둔보(屯堡)를 설치하며,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을 헤아려 유랑민을 모으고, 이들을 안정시키니 동군(東郡)이 편안해졌다. 1598(선조 31)에는 경기방어사로서 광주(廣州) · 이천(利川)의 사민(士民)을 규합해 한성(漢城) 방어에 힘썼다.

1602(선조 35)에 윤두수(尹斗壽)가 유표(遺表: 죽을 때 올리는 )에서 독성(禿城)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하자 선조는 변응성을 발탁해 이 일을 맡겼다. 그는 성을 높이 쌓고, 도랑을 깊이 파는 한편, 노궁(弩弓) · 석거(石車) · 화포(火砲) 기계(器械)를 설치하고, 병사들을 조련하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샘을 파서 백성으로 하여금 산업에 즐겁게 종사하게 하니, 일년이 넘자 성중의 인구가 200호가 늘어나고, 창고와 사찰이 100 여개소나 되어 경기도의 큰 관문이 되었다. 이 말이 왕에게 전해지자 왕이 가상히 여겨 구마(廐馬)를 내려주고, 따듯한 유지(諭旨)를 내려 격려했다.

1604(선조 37) 9월에 부모의 묘를 개장(改葬)하기 위해 사임하고자 했으나 1606(선조 39)에 가선대부로 승진, 남도병사에 제수되고 얼마 있다가 북도병사에 제수되었다. 1608(선조 41)에 내직으로 들어와 훈련원 도정(都正)을 거쳐 포도대장으로서 주사당상(籌司堂上)을 겸하고, 양남(兩南)의 기무(機務)를 관장했다. 겨울에 조정에서 양남산성(兩南山城)을 폐치하려고 하자

  양남은 오로지 지리산의 험고(險固)한 것을 의지해 촉석(矗石)과 교룡(蛟龍)이 바로 그 요 쇄(要塞)입니다. 국가의 존망이 양남을 얻고 잃음에 달려 있고, 양남의 얻고 잃음은 다만 험한 곳을 웅거해 요쇄를 지키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나라 무왕(武王)은 백벽(百 壁)에서 곤경을 당했고, 당나라 태종은 안시성(安市城)에서 굴복했습니다. 수비와 방어의 중요함은 이 두 성이면 또한 만족하지만 다만 일찍이 한 가지도 이로움을 얻지 못함으로서 사람들이 반드시 죽을 것으로 알고 이제 다 폐허가 되었습니다. 대저 병사에게 병기와 군 량이 없어 당()의 수양(睢陽)이 함락되었고, 백성들이 원망과 노여움을 품은 것은 조장 자(趙長子)가 완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수비를 갖추고도 장수가 능하지 못하면 또한 패 하나니 지난 번의 진주가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을 얻어 지키고, 그 조세를 감하며, 백성들 은 병농(兵農)을 겸해 그 집을 보전하고, 그 성을 지키면 가히 양남을 보전해 국세가 굳건 해질 것입니다  

라고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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