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협의 아들 응성의 자는 기중(機仲)이다. 그는 1552(명종 7) 329일에 태어나 1616(광해군 8) 정월 27일에 죽었다. 향년 65. 어려서부터 총명해 문예가 일찍 성취되어, 약관에 누차 문과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28세에 붓을 던지고 무과에 응시해 1579(선조 12)에 급제했다. 9년간 선전관, 훈련원 부정 겸 내승(內乘), 용강 · 함종 · 장단부사를 역임하고 1587(선조 20)에 통훈대부로 승진해 다음해에 강계부사가 되었다. 선조가 비변사에 명해 무신 가운데 차서를 막론하고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자 유홍(兪泓) · 신립(申砬) · 이산해(李山海) · 이순신(李舜臣) · 변응정 등이 천거되었다.

1590(선조 23) 에 아버지가 죽어 복상 중에 있었는데, 경주는 영남의 큰 방어지인데 변협이 아니면 지키기 어렵다고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사람을 기용함)해 경상좌도방어사 겸부윤(慶尙左道防禦使兼府尹)에 기용하고 막료를 가려 종군토록 했다. 조금 후에 경상우도수사로 승진했고, 1593(선조 26)에 광주(廣州)목사로 옮겼다. 얼마 후 이천(利川)부사로 옮겨 경기방어사를 겸임해, 용진강(龍津江) 위에 진을 치고, 수책(水柵)을 설치하며, 토성(土城)을 쌓고, 척후(斥候)를 살피며 병기(兵機)를 수선하고, 군량을 비축해 경기 동부를 방어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그는 원호(元豪)와 협력해 1592(선조 25) 6월 중순에 마탄(馬灘)에서 적장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 · 아끼가스 다네나가(秋月種長) · 다가하시 모토다네(高橋元種) 등과 싸워 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때에 왜적들이 원주에 웅거해 곧바로 서울로 처 들어 오자 그는 사졸을 격려하고, 한강 상류의 물을 막았다가 적군이 절반 정도 건너왔을 때 물을 트니 적들이 크게 놀라 패주했다.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 맞아 안개가 자욱한 틈을 타 공격해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런데 당시 북병사(北兵使)가 결원(缺員)이라 왕이 대신들에게 누가 적임인가?”를 물으니,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변응성이 가히 마땅하나 지금 한강 상류가 급하니 외지로 내보내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했다. 얼마 후 왜적이 물러가자 왕이 그를 독성(禿城)이 남도(南道)로 통하는 요충이라 해 수원부사 겸 방어사에 임명하고 면포(綿布) 100필을 하사했다. 변응성이 몸소 장정 500 여명을 모아 군사를 조련하고, 상부에 상황을 보고해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리하여 적병이 침범했을 때 성을 잘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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