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1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565(명종 20) 겨울에 아버지가 죽어 날씨를 불구하고 배를 띄우려 하니, 선리(船吏)가 듣지 않았다. 강행했더니 바다 가운데 이르러 과연 태풍을 만나 돛이 부러지고 배가 거의 전복될 뻔 했으나 살아 돌아오니, 사람들이 효심에 감동된 결과라 했다. 복상(服喪)을 마치고 화양(花梁)첨사를 거쳐 경상좌도수사로 옮겼다가 전라병사가 되었는데, 아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상심할까봐 아무 조처 없이 달려갔다. 1569(선조 2)에 안변부사에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고, 남도병사로 옮겼으니 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미평(古未坪)이 우리 땅이었는데 버려두자 호로(胡虜)들이 잡거(雜居)했다. 이에 그는 상소를 올려 토지를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호로들을 쫓아냈다.

1571(선조 4)에 가선대부로 승진해 북도병사가 되었으나 어머니가 편찮아 상소를 올려 사임하고 돌아왔다. 1572(선조 5)에 어머니가 죽었다. 당시 야인(野人)들이 서해평(西海坪)에 멋대로 살아 두통거리였으나 장수들이 여러 번 패해 조정에서는 협()의 어머니 상의 복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그를 즉시 평안병사에 임명했다. 그가 야인을 위엄과 시혜로 다스리자 야인들이 감히 변경지방을 범하지 못했다. 1577(선조 10) 여름에 조정으로 들어와 한성부 좌윤, 병조참판을 거치는 등 병조에 4, 한성부에 2, 동지중추부사 3, 5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582(선조 15) 여름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곧 판한성부사, 판공조사로서 언제나 도총관, 지훈련원사, 포도대장, 특진관, 비변사(備邊司) · 군기시(軍器寺) · 원유시(苑囿寺)의 제조(提調)를 겸임하고 이 때부터 지방으로 나가지 않았다.

1587(선조 20)에 왜구가 녹도(鹿島)에 처 들어 와 수장(守將) 이대원(李大源 )이 전사하자, 선조가 신립(申砬)으로 좌방어사를, 변협을 우방어사로 삼아 적을 막으라 했다. 그는 왜적이 본래 깊이 들어올 계책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쯤은 이미 물러갔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랬더니 과연 왜적이 물러갔다. 1589(선조 22)에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평의지(平義智) · 겐소(玄蘇) 등을 보내어 공작(孔雀), 준마(駿馬)를 바치고 우리의 허실을 엿보려 했는데, 정신(廷臣)들이 혹은 통호를 하는 것이 좋다고도 하고, 혹은 불가하다고도 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보사(報使)를 보내 그쪽의 동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의론이 정해짐에 선조는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자 상신(相臣)에게 물어 보는 중에 그가 병이 들어 1590(선조 23) 95일에 죽었다. 그해 광주(廣州) 초부면(草阜面) 운길산(雲吉山) 남록(南麓) 건좌(乾坐)에 장사지냈다.(지금의 남양주시 鳥安面 松村里 264번지)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신도비는 문충공 이정구(李廷龜), 시장(諡狀)은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행장은 외6대손 정만석(鄭晩錫)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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