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1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의 자는 자인(子寅)이다. 아버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중추부 경역(經歷, 증영의정을 지낸 계윤(季胤)과 증이조참판, 용성군(龍城君) 최자양(崔子洋)의 딸인 어머니 증정경부인 수원최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528(중종 23) 1022일에 태어나 1590(선조 23) 95일에 죽었다. 향년 63. 생부 계윤(季胤)은 원양군(原陽君) 영호공(襄胡公) 사겸(士謙)의 막내아들로 현령 효공(孝恭)의 양자가 되었다.

나면서 기우(氣宇)가 남다르고, 붓글씨를 배운지 얼마 안 되어 벽에 큰 글씨로 장군가”(將軍家)라고 썼으며, 6세에 우물에 빠졌는데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새벽에 물 길러 온 사람을 보고 천천히 말하기를 나는 주인집 가동(家童)이니, 모름지기 굵은 새끼줄을 내려 구해 달라고 했다. 온 집안이 놀라서 분주한데 그만은 편안하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0세에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에 올라가 먼 가지를 잡아다니다가 가지가 휘고 몸은 매달려 있었으나 밑은 절벽이었다. 여러 아이들이 두려워서 흩어졌으나 그는 서서히 바지를 벗기게 하고 두꺼운 포단 위에 떨어져 부상을 입지 않았으니 어려서부터 지려(志慮)가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데가 있었다.

1548(명종 3)에 무과 3등으로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령으로 나갔다. 1555(명종 10)에 왜구가 처 들어와 읍진(邑鎭)이 다 무너졌으나 그는 홀로 성색(聲色)을 바꾸지 않고 기계를 수선하고 험한 곳을 지켜 혹 적의 눈을 속이기도하고, 갑자기 출격해 적이 먹을 것이 모자른 것을 틈타 요격(邀擊)해서 대파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이 많았다. 또 명나라 사람을 포로로 잡아 보내니 천자가 은()과 비단을 상으로 내리면서 현감 변협(邊恊)이 외로운 성을 홀로 지켰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때 변협의 나이 겨우 28세 때였다.

이 무공으로 장흥(長興)부사로 승진했는데, 난을 겪은 후 장흥부가 탕잔(蕩殘)되어 그가 무너진 집을 수리해 주고 상처를 입은 사람을 쓰다듬어 주니 1년이 넘기 전에 관민(官民)이 전처럼 복구되었다. 그러나 중풍(中風)에 걸려 5년 동안 문을 닫고 정양했다. 병이 좀 낫자 다시 훈련원 부정(副正) 겸 내승(內乘)에 임명되었다가 조양(調養)을 하라고 파주목사로 내보냈다. 파주에 있을 때 율곡(栗谷)선생에게 주역을 배웠다. 이어 향약(鄕約)을 시행하니 읍의 풍속이 크게 변해 지금까지 오히려 그 유속(遺俗)이 남아있다. 1563(명종 18)에 통정대부로 승진해 만포(滿浦)첨사에 제배되고, 다음 해에 제주목사로 이배되었다. 당시에 마침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제주에 귀양와 있었는데 그가 장살(杖殺)하니 사림이 통쾌하게 여겨 편지를 보내 축하하자 나라 사람이 죽인 것이지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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