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8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3남 오천(伍千)의 자는 무강(無疆)으로 1445(세종 27) 924일에 태어나 1513(중종 8)에 죽었다. 향년 69. 1465(세조 11)에 무과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에 합격해 경력(經歷), 훈련원 첨정(僉正) · 부정(副正), 풍천(豊川)부사, 사복시정(司僕寺正), 통예원 좌통례, 전라수사, 공주 · 나주목사, 전라병사를 역임하고 승정원에 들어가 여러 번 승지를 지내고 내승(內乘)을 겸임했다. 하루는 성종이 특별히 화공(畵工)을 시켜 그의 상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유고가 있었으나 6.25사변 때 없어졌다고 한다. 묘는 주을동(注乙洞) 아버지 무덤 가까이에 있다.(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산 130번지) 부인은 선공감부정 박귀손(朴貴孫)의 딸인 운봉(雲峰)박씨다. 1450(세종 32)에 태어나 1510(중종 5)에 죽었다. 향년 61. 남편과 함께 쌍분으로 묻혔다. 오천은 3(士溫 · 士良 · 士儉) 5녀를 두었다. 이 중 장자 사온(士溫)은 평안도사, 병조참판을 지냈고, 1511(중종 6)에 죽었다. 부인은 첨정 김훈조(金薰祖)의 딸인 경주김씨다. 차자 사량(士良)은 무과에 급제해 풍저창수(豊儲倉守), 남포(藍浦) · 덕천(德川)의 수령을 지냈다.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묘는 광암(廣巖) 선영(先塋)에 있다. 부인은 생원 김국량(金國樑)의 딸인 청풍김씨다. 남편과 함께 쌍분(雙墳)으로 묻혔다.

상회(尙會)4자 수()의 자는 영숙(永叔)이다. 1447(세종 29)에 태어나 1524(중종 19) 710일에 죽었다. 향년 78. 1469(예종 1)에 무과에 급제하고, 1476(성종 7)에 중시(重試)에 합격해 훈련원 정()이 되었으며, 1478(성종 9)에 임기가 차 공조참의로 승진했다. 1479(성종 10) 3월에 동부승지가 되고, 10월에는 우부승지로서 평안도별선위사(平安道別宣慰使)로 파견되었다. 11월에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다음해 6월에 우승지가 되었다. 무신으로 승지가 되기 어려웠는데 변수가 승지에 임명된 이후에는 무신도 승지가 될 수 있었다. 1483(성종 14) 12월에 형조참의가 되고, 다음해 4월에 병조참지, 8월에 절충장군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2월에 통정대부 호조참의가 되었다. 1485(성종 16) 정월에 사간원의 공박을 받아 물러가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89(성종 20) 5월에 충청도병마절도사, 1492(성종23) 11월에 경상우수군도절도사가 되었으나, 1494(성종 25) 4월에 만호 이극검(李克儉)이 수군 1명이 왜적에게 죽은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해 국문을 받았다. 그후 1497(연산군 3) 8월에 영안북도절도사로 재발탁되었으나 대간이 그의 자질을 문제삼아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좌천되었다. 영중추 정문형(鄭文炯)이미 병사로서 적당치 못하다고 한 이상 부사로 임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해 장령 김물(金勿)이 변수를 내금위장으로 삼을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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