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4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문학(文學)에 뛰어나고 정직하다고 해 사헌부 지평에 임명했다. 1507(중종 2)에 고성(固城)현령이 되었다가 곧 병조정랑으로 옮겼다. 1508(중종 3)에 시강원 사서(司書), 1509(중종 4)에 사헌부 장령과 집의가 되었으나 병으로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상경해 임명장을 받으라는 임금의 독촉이 성화같아 어쩔 수 없이 가마에 몸을 실어 길을 떠났으나 1509(중종 4) 38일에 단양의 객사에서 죽었다. 향년 75.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특별히 비단과 말을 내려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의 둘째아들인 광대(光大)가 시신을 수습해 신계동(新溪洞)의 안산(案山) 주봉(主峰) 아래 유좌(酉坐)로 장사지냈다. 묘표는 국오(菊塢) 강경순(姜景淳)이 짓고, 묘갈명은 진성이씨 이중철(李中轍)이 지었다.

변희리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학문과 덕행을 겸비해 일찍이 조정에 나갔으나 사화를 피해 은거했다. 애석하게도 남겨놓은 글들이 없다. 변희리는 전가록(傳家錄)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집의(執義) 귀계공(歸溪公) 변희리(邊希李)의 전가록(傳家錄)에 의하면이라는 인용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가록이라는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가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49년에 예천 금곡(金谷)에 사는 족인가(族人家)의 옛 바구니 속에서 옛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는 변안렬에 대한 제문(祭文) · () · 행장(行狀) · 묘표(墓表) 등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전가록에 수록되어 이었던 것에 대은연보와 후세사서에서 수집한 사료들을 보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1950년에 변종기(邊鍾基)시조실기(始祖實記)로 집성한 것을 뒤에 大隱實記에 수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은실기1에는 가(-不屈歌)와 시(-東國留居吟 2, 漢陽流所吟 4), 그리고 부록이 수록되어 있고, 2에는 척실(摭實-譜牒 · 東史 · 彙纂麗史 · 諸賢評論)이 있는데 윤근수(尹根壽) · 조진관(趙鎭寬) · 김약련(金若鍊) 등의 변안렬을 변호하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부록에는 변안렬의 연보(年譜) · 제문(祭文-정몽주 · 이색 · 길재 · 이숭인 · 이방번) · (-정몽주) · 유사(遺事-길재) · 행장(行狀-이색) · 묘표(墓表-朴承任) · 묘표후지(墓表後識)-邊循) · 명신전(名臣傳-洪汝河) · 송곡서원상량문(松谷書院上樑文-金冕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대은실기1949년 양주성소회(楊州省澆會)에서 간행한 목판본 高麗原川府院君大隱實記.

부인은 둘인데, 첫째부인은 유유(柳牖)의 딸이요, 안동김씨인 판관 김계권(金係權)의 외손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묘는 예천 북쪽 5리 쯤에 있는 나부촌(羅浮村) 뒤 계명현(鷄鳴峴)산록 끝에 을좌(乙坐)로 있다. 둘째부인은 청암(淸巖) 이정위(李正偉)의 딸 숙인(淑人) 전주이씨다. 묘는 남편 묘 아래 유좌(酉坐)로 있다. 희리(希李)의 첫째아들 필대(必大)는 충순위(忠順衛)에 속해 있었고, 1472(성종 3)에 태어나 1521(중종 16) 49일에 죽었다. 향년 50. 묘는 아버지 묘 왼쪽에 자좌(子坐)로 있다. 부인은 별제 권선(權善)의 딸이요,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의 외손녀인 안동권씨다. 묘는 남편과 쌍분(雙墳)으로 묻혔다. 둘째아들 광대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부인은 군수 신숙권(申叔權)의 딸이요, 좌의정 신개(申槪)의 증손녀요, 남양홍씨 홍계상(洪繼常)의 외손녀인 숙인 평산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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