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3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차자 정()4(希哲 · 希李 · 希潁 · 希達) 1(金進明에게 시집갔다)를 두었다. 장남 희철(希哲)은 첨지중추부사로서 부인은 선전관 최사청(崔思淸)의 딸 최씨다. 차자 희리(希李)의 자는 선보(仙甫), 호는 귀계(歸溪). 1435(세종 17)에 태어나 1509(중종 4)에 죽었다. 향년 75.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지녀 아버지가 이 아이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1462(세조 8)에 생원이 되고, 1466(세조 12)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창선교위(彰善校尉)를 받고 곧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1474(성종 5)에 아버지를, 다음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서 출세할 뜻이 없었다. 벼슬을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모를 여의고 근근이 붙어 있는 목숨으로 외롭게 사는 사람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한들 무슨 영광이 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큰형의 권고에 따라 1486(성종 17)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고 성현찰방(省峴察訪)이 되었다. 그러다가 1487(성종 18)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88(성종 19)에 형조좌랑, 1489(성종 20)에 황산찰방(黃山察訪)을 지냈다. 1492(성종 23)에 무장(茂長)현감이 되어 소신신(召信臣)과 두백(杜伯)과 같은 치적을 이루었다. 임기를 마치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사옥(史獄)이 일어나 이극돈(李克墩)이번 옥사는 나라의 큰 일이다. 이세좌(李世佐) · 변희리(邊希李) · 노공필(盧公弼)이 각기 간언(諫言)의 직분을 맡고 있으니 3(三司)가 함께 상주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말했다. 이에 변희리는 인륜이 다하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말았다. 떠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선비들을 무고(誣告)하는 짓은 차마 할 수 없다고 하고, 즉시 사직(司直) 자리에 있는 종제(從弟) 변희예(邊希乂)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떠날 때 정승조(鄭承祖)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대는 범맹박(范孟博)이요,(君爲范孟博)

나는 오문졸(吳門卒)이라.(我作吳門卒)

양의 창자처럼 꾸불꾸불한 길로 떠나가노니,(羊腸去去路)

서주의 호걸(豪傑)에게 부끄럽구나.(慙愧西州傑) 

그는 배를 사서 예천(醴泉)의 귀래곡(歸來谷)에 은거해 귀계(歸溪)를 자기의 호로 삼았다. 집 앞에 버드나무를 심고 십류선생(十柳先生)이라 했다. 각건(角巾)을 쓰고 베옷을 입고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계곡을 소요(逍遙)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