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차희(次熹)는 첨추공파(僉樞公派)를 이루었는데 4(· · · ) 2(辛潤祖 · 李閏昌에게 시집갔다)를 두었다. 장자 굉()은 장가들기 전에 자손이 없이 죽고, 차자 정()은 자를 안지(安之)라 하고, 호를 송와(松窩)라 했다. 실묘해 변안렬 묘역에 설단했다. 1415(태종 15)에 한양 명례방(明禮坊)에서 태어나, 1474(성종 5) 78일에 죽었다. 향년 60. 1441(세종 23)에 진사가 되어 학행으로 세자세마(世子洗馬)에 임명되었다. 1454(단종 2)에 의성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455(단종 3)에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1457(세조 3)에 마침 황해도에 흉년이 들자 왕이 그에게 사정을 알아보라고 했다. 복명하고 청도군수에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58(세조 4)에 금부도사, 한성주부, 사복시주부를 역임하고, 1460(세조 6)에 수천(隨川)군수를 거쳐 1467(세조 13)에 영변(寧邊)부사, 선혜청 낭청, 한성서윤을 지냈다. 묘는 용인 남방곡(南方谷)에 있다. 지금은 실묘해 변안렬 묘역에 설단했다. 부인은 첨지중추부사 손서(孫敍)의 딸인 밀양손씨다. 1418(태종 18)에 태어나 1432년에 정()에게 시집와 1474(성종 5) 326일에 죽었다. 향년 57. 묘는 남편의 묘 뒤에 있다. 지금은 실묘해 아버지와 함께 변안렬 묘역에 설단했다. 묘지명은 퇴계 이황이 지었다. 김종직(金宗直)의 제문과 만사(輓詞)가 전한다. 그는 정()을 지기(知己)라고 했다.

3자 영()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서천(舒川)군수를 지냈다. 묘는 양주 미동리(美洞里)에 있다. 부인은 생원 임복생(任復生)의 딸 풍천(豊川)임씨다. 4자 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로 부인은 여흥민씨다. 장녀는 판서 신인손(辛引孫)의 아들 신윤조(辛潤祖)에게 시집가서 신승담(辛承聃) · 신성담(辛成聃: 進士) 등의 아들을 두었다. 둘째딸은 인천이씨 이윤창(李閏昌)에게 시집갔는데 자손이 없어 친정 조카인 집의(執義) 변희리(邊希李)를 시양자(侍養子)로 맞이해 지금까지 자손들이 이윤창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