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후예,조선에서 벼슬 살다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대은 변안렬이 원주변씨의 시조요, 그 아들 현() · () · ()2세다. 현은 2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충(克忠) · 극민(克愍)이요, 두 딸은 박규(朴葵)와 박대생(朴大生)에게 시집갔다.

3세 극충은 별좌(別坐)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叅判) 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인은 전의감판사(典醫監判事) 이화신(李孝信)의 딸, 대제학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의 손녀인 인천이씨다. 차자 극민(克愍)은 문과를 거쳐 형조참의를 지냈다. 묘는 양주(楊州) 성재동(聖在洞)에 계좌(癸座)로 있다. 그러나 그후 다시 남양주시 진건면 지사동 변안열 산소 끝으로 옮겼다. 부인은 정랑(正郞) 김상근(金相瑾)의 딸인 안동김씨다. 극민(克愍)은 천자(天資)가 청숙(淸肅)하고, 풍의(風儀)가 준수했으며,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 1972416일에 양주군 진건면(眞乾面) 용정리(龍井里) 변안렬의 산소 밑으로 이장했다. 극민의 외아들 재중(載重)은 장예원 사의(司議)를 지냈으나 상소를 잘못 올려 태천(泰川)으로 귀양갔다가 그곳에 눌러앉았다. 묘는 태천현 서읍내면(西邑內面) 송곡동(松谷洞) 와우산(臥牛山)에 자좌(子坐)로 있다. 큰사위 박규(朴葵)의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유명한 박세당(朴世堂)의 집안이요, 둘째사위는 목사를 지낸 밀양박씨 박시(朴蓍)의 집안이다.

차자 이()7(次熹 · 尙朝 · 尙覲 · 尙會 · 尙同 · 尙聘 · 尙服) 3(鄭由吉 · 李漸 · 李承孫에게 시집갔다)를 두었다. 장자 차희(次憙)는 상희(尙憙)라고도 했으며, 자는 회문(晦文 )이다. 첫째부인 경주김씨의 아들로, 1392(태조 1)에 태어났다. 천자(天資)가 준수하고, 글을 잘했으며, 기력이 장대했으나,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해 과거를 포기했다. 1426(세조 8) 에 음직으로 헌릉(獻陵) 참봉 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61(세조 7)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를 받았다. 1462(세조 8)에 부인과 함께 큰 아들 정()의 임소(任所)에 갔다가 병이 나 관아에서 죽었다. 향년 81. 묘는 찾지 못하고 남양주시 지사동(芝沙洞) 변안렬묘역 아래에 제단만 만들어 놓고 있다.행장은 좌찬성 이언적(李彦迪), 묘지명은 우찬성 권벌(權橃)이 지었다. 부인은 풍산군(豊山君) 정양공(靖襄公) 심구령(沈龜齡)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풍천심씨(豊川沈氏). 남편보다 몇 일 앞서서 죽어 남편과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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