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 제거음모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이성계파들은 변안렬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며 대역죄(大逆罪)로 몰아 죽이고자 했다. 처음에는 관련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던 김저도 혹형(酷刑)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했다. 이 사건으로 우왕은 강릉으로, 창왕은 강화로 추방되었다. 변안렬은 공양왕을 세운 뒤에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승진했다. 변안열이 역임한 관직 중 가장 높은 관직이다.

1389(창왕 1) 11월 정축(丁丑)일에 심덕부 〮․ 지용기 · 정몽주 · 설장수 · 성석린 · 조준 · 박위 · 정도전 등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 모여 윤소종(尹紹宗)의 헌의로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을 결의했다. “· 창왕은 원래 왕씨가 아니니 가히 종사를 받들 수 없으며, 또한 천자의 명이 있으니 마땅히 가()를 폐하고 진()을 세울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는 신종(神宗)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울 것이다라고 의론하다가 의론이 분분해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성계가 심덕부 등 8인과 함께 공민왕의 정비(定妃)에게 나아가 군사로 위협해 재가를 받으니, 종친 · 백관이 모두 따랐다고 한다.

1390(공양왕 2)정월에 랑사(郞舍) 윤소종(尹紹宗) · 이첨(李詹) · 오사충(吳思忠)등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다만 파직만 시켰다. 이들은 홍영통(洪永通) · 우현보(禹玄寶) · 우인렬(禹仁烈) 우홍덕(禹洪德) 왕안덕(王安德) · 정희계(鄭熙啓) 조방흥(趙邦興) 이림(李琳) 27인도 변안열과 공모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윤소종 등은 

홍영통(洪永通) 우현보(禹玄寶) 왕안덕(王安德) 우인렬(禹仁烈) 정희개(鄭熙啓)등은 실 로 변안렬과 더불어 역모를 도모했으니 왕씨의 신자(臣子)로서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 수입니다. 원컨대 변안렬 홍영통 우현보 우인렬 왕안덕 등을 극형에 처하소서 

홍영통은 무리를 지어 이인임(李仁任) · 임견미(林堅味) · 염흥방(廉興邦)과 부화(附和)해 악한 일을 같이하고, 서로 도우며, 흉악한 무리로서 살육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홍영통은 오직 우왕의 인척이기 때문에 수령(首領) 자리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우현보는 지위가 상상 (上相)에 이르렀는데 자리를 잃을까 걱정하고, 많은 물품을 빼앗았으며, 간사하고 아첨하기 를 좋아해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흩으렸습니다. 왕안덕은 장수의 이름에 올랐으나 매번 싸 움에 패했고, 남포(藍浦) 싸움에서는 전군(全軍)을 몰살시켜 나라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 습니다. 군법에서는 마땅히 사형될 죄입니다. 우인렬은 이서(吏胥) 출신으로서 권세가에 연 줄을 대어 지위가 정부(政府)에 속해 있으나 공덕은 이 나라 백성들이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정희계는 염흥방과 인척을 맺고 멋대로 불의를 자행했으며, 또한 우왕의 처 최 천검(崔天儉)의 딸이 좋아함으로써 위화도회군 때 사형을 면했습니다. 이들 다섯 사람의 죄악은 너무나 커 반드시 주살해야 합니다. 하물며 변안열과 모의해 우왕을 추대하려 했으 니 이는 더욱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임금이 사사로이 할 수 없는 바입니다. 바라 건대 전하는 결단을 내려 대의(大義)를 사헌부에 하달해 국문하고 치죄(治罪)토록 하십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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