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정벌과 변안열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고려가 원에 복속된 후 철령(鐵嶺) 이북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동령부(東寧府), 제주의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가 원의 직할령이 되었다. 이 중 동령부는 1290(충렬왕 16)에 고려의 간청으로 20 여년 만에 돌려주었고, 탐라총관부는 1294(충렬왕 20)에 폐지되었으며, 쌍성총관부는 1356(공민왕 5)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의 내부(來附)로 유인우(柳仁雨)를 보내 탈취했다. 그런데 1368(공민왕 17)에 주원장(朱元璋)이 원의 대도(大都)인 북경(北京)을 점령하고 원의 순제(順帝)가 상도(上都: 開平府)로 달아났다가 다시 카라코름(내몽고)으로 달아났다. 이에 주원장은 금릉(金陵)을 수도로 명나라를 세우고, 동령부가 있던 요양(遼陽)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고려는 친명정책을 써서 정몽주(鄭夢周)를 보내 명과의 관계를 완화시키려 했으나, 명은 오히려 세공(歲貢)한 말이 작고 왜소하다고 트집을 잡아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의 이러한 강압에 반발해 이인임(李仁任)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최영은 요동정벌(遼東征伐)을 강행했다. 명은 철령 이북의 땅은 본래 원에 속했던 것이니 앞으로 이를 요동에 속하게 하겠다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70 여참()의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는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해 왔다. 우왕은 병을 핑계로 왕득명을 만나 주지 않았고, 최영은 첩문(牒文)을 가져 온 요동 군인 22인 중 5인을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그리고 우왕은 1388(우왕 14) 4월에 서해도에 가는 도중에 봉주(鳳州)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출사(出師) 명령을 내렸다.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부르짖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以小逆大 一不可)

농사지을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하다.(夏月發兵 二不可)
온 나라를 동원해 원정에 임하면 그 틈에 왜구가 처들어 오면 불가하다.(擧國遠征 倭乘 其虛 三不可)

무덥고 비오는 여름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질병이 유행하면 불가하다.(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우왕도 그럴듯하게 여겼으나 이미 군사를 일으켜서 중지할 수 없다고 했다. 이성계는

꼭 대계(大計)를 이루고 싶으면 마땅히 서경(西京)에 주둔하셔서 가을에 출사(出師)하면 곡 식이 들에 널려 대군이 먹을 것이 족할 것이니 북을 두드리며 앞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지금 때가 아닌데 출정하면 비록 요동의 한 성을 뺀다고 하더라도 비가 바야흐로 내 려 전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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