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의 왜구 소탕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변안렬은 왜구를 물리치는 데도 공헌했다. 1364(공민왕 13)에 왜구가 착량(窄梁: 수원)에 쳐들어 오자 판개성부사 석문성(石文成)과 함께 민가를 약탈하는 왜구를 토벌해 민심을 안정시킨 적이 있다. 1376(우왕 2) 7월에 변안렬은 도당(都堂)에서 왜구가 바야흐로 심히 일어나는데, 오직 방어도감에서만 군기를 만들면 혹 부족할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각사와 각 부대의 제도감(諸都監)에 명해 각각 그 관청의 돈으로 (군기를) 기한을 정해 만들게 해 완급(緩急)에 대비케 하소서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마도 새로 맡은 의용우군(義勇右軍)의 무장(武裝)에 필요한 무기를 조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나 한다.

이 해 9월에 변안렬은 다시 양광전라도지휘사(陽廣全羅都指揮使) 겸조전원수(兼助戰元帥)가 되어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유실(柳實) 등과 함께 전라도 부령(扶寧: 扶安)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니, 도당(都堂)에서 천수사(天壽寺)에 나와 나희(儺戱)를 행하고 백금(白金) 1 (), 안마(鞍馬), 의복을 하사받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했다.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적의 노략질로부터 지켜냈기 때문이다.

1377(우왕 3)에 그는 경기도총사(京畿都總使)가 되어 수원 양성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해주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최영과 함께 해평(海平)에서 왜적을 격파했다. 이 때 왜구가 전선 50 척을 불태우고, 1천 여명의 병사를 죽였으며,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가 유시(流矢)를 맞아 죽을 뻔 했다. 또 강화부에서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이 적에게 패해 마니산(摩尼山)으로 피하자 우왕은 최영을 6도도통사(六道都統使)로 삼아 왜구를 치게 했다. 이 때 변안렬은 이성계 양백연(楊伯淵) 나세(羅世) 이원계(李元桂) 등과 함께 최영을 도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그리고 경산(京山)에서 300, 양광도에서 1.000, 교주(交州) 서해도 평안도에서 각 500인 등 무려 3.000 여인의 승군(僧軍)을 모집해 전선을 만들었다. 4월에는 왜구가 서강(西江)에 출몰해 경성을 위협했다. 그리고 8월에는 왜구가 신주(信州) 문화(文化) 안악(安岳) 봉주(鳳州) 등지에 침입하자 원수 양백익(楊伯益) 나세(羅世) 박보노(朴普老) 심덕부(沈德符) 등이 나가 막았으나 막지 못하자 변안렬은 이성계 임견미(林堅味) 등과 더불어 조전원수로서 출전했다. 이어 9월에 또 왜구가 영광 장사(長沙) 모평(牟平) 함풍(咸豊) 등지와 해주 평주에 침입하자 변안렬은 최영 등과 함께 출전해 적을 섬멸했다. 이에 크게 놀란 우왕은 판사 최무선(崔茂宣) 등의 주장에 따라 화통도감을 설치해 화약과 화기를 만들어 1380(우왕 6)에 나세(羅世) 등이 하3도에서 적선 500 척을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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