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은 누구인가? 4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8월에 군사가 검산곶(黔山串)에 이르러 모든 장수들이 말하기를 배가 떠난 날이 이미 오래 되었고 바람이 또 점점 차가우니 마땅히 속히 행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영은 오늘은 바람이 이롭지 못하고 서해의 전함(戰艦)이 백이나 되는데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어찌 가겠느냐?“고 했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울분을 터트렸고, 배가 보길박(普吉泊)에 이르러 최영이 또 바람이 없어 머물러야 하겠다고 하자 모든 장수들이 용병(用兵)하는 기틀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지체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뒤에 만약 의론이 있으면 허물을 장차 누가 감당할 것이냐?“고 했으나 최영이 역시 듣지 않았다. 해가 이미 오시(午時)가 되어도 오히려 머뭇거리고 떠나지 않자 변안렬의 휘하 군사가 먼저 떠나니, 모든 도()의 배들이 돛을 달고 일제히 떠났다. 그러자 최영도 할 수 없이 배를 출발시켰다. 이튿날 제주에 이르러 목호들을 사면으로 나누어 치니, 목호들이 3천 여 기병(騎兵)으로 명월포(明月浦)에서 항거하자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을 시켜 목호들을 효유하고, 항복을 거부하는 자는 모두 죽였으며, 금패(金牌) 9, 은패(銀牌) 10, 인신(印信) 30, 1천필을 노획했다. 이 과정을 보더라도 변안렬은 막강한 최영의 뜻을 꺾고 배를 먼저 발진시킬 정도로 자신이 있고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제주 목호 토벌도 변안렬의 공로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공로로 변안렬은 판밀직지문하사(判密直知門下事)의 직책을 받았으며,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직되었다. 변안렬이 제주 목호를 치러 간 사이에 홍윤(洪倫) 최만생(崔萬生) 등에 의해 공민왕이 시해됐다. 10월에 돌아 온 최영 변안렬 등은 공민왕의 재궁(梓宮)에 복명했다.

1375(우왕 1)에는 부원수(副元帥)로서 심양왕(瀋陽王) ()의 책동을 극복해 양절선위익찬공신(亮節宣威翊贊功臣)에 책봉되었다. 1376(우왕 2)에 집의 김승득(金承得) 헌납 안정(安定) 등이 만생(萬生)과 윤()의 부모, 처자, 형제는 베고 그 숙질, 종형제는 삭직해 멀리 귀양보내 영구히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고 또 대역(大逆)은 만생과 윤 뿐만이 아니오니, 홍관(洪寬) 권진(權瑨) 한안(韓安) 노관(盧琯) 등도 모두 일체로 시행함이 마땅합니다라고 상소했다. 그러나 문하평리 변안렬은 목인길(睦仁吉) 왕안덕(王安德) 우인렬(禹仁烈) 등과 함께 적신(賊臣)의 부형은 이미 모두 멀리 귀양보냈으니, 청컨대 그 사형은 면하게 해주소서라고 반대했다. 당시에 권력자 지윤(池奫)이 역당(逆黨)의 전민(田民)과 자산(資産)을 탐내어 윤과 만생의 일족을 모두 베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출장(出將)하면 적을 격파하고 입상(入相)하면 공정한 정사(政事)를 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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