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을 누구인가?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5세 안렬은 바로 원주변씨의 시조이다. 안렬의 자는 문성(文成) ·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또는 불굴당(不屈堂)이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1334(충숙왕 복위 3)에 심양사제(瀋陽私第)에서 태어나, 1390(공양왕 2)에 죽었다. 향년 57. 지조가 청고(淸高)하고 국량이 넓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15 · 6세에 탈탈불화(脫脫不花)를 사사(師事)1343(충숙왕 복위 3)에 공부랑중(工部郞中)으로 천거되었으나 곧 버리고 하의(河義)의 집에서 살았다. 1351(충정왕 3)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화관(華官) 현직(顯職)을 거쳐 1년 안에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그는 1351(충정왕 3) 12월에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에게 장가를 가 고려로 오게 되자 19세에 수장(首將)으로 고려로 왔다. 이 때 조카 숙(), 아우 안서(安緖)와 함께 왔다. 이 숙위(宿衛) 업무를 수행하는 수장으로 삼기 위해 형부상서를 초수(超授)한 것 같다. 1353(공민왕 2)에 왕은 자기의 척리(戚里)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혼인하게 하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게 했다. 이 때 풍양(豊壤)의 전시(田柴)를 식읍으로 받았다.

원주원씨는 원주지방의 대호족이었다. 시조 원극유(元克猷)는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을 지냈고, 그 후예 중 충렬왕 조의 원충갑(元冲甲)은 합단적(哈丹賊)의 침입을 물리쳐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이 되었으며, 충렬왕-원종 조에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던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순공(文純公) 원부(元傅), 찬성사 원관(元瓘) 원충(元忠), 동지밀직사사 원선지(元善之), 공민왕조에 홍건적을 물리쳐 일등공신이 된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문정공(文定公) 원송수(元松壽) 등이 배출되었다. 원부는 원의의 증조요, 원관은 할아버지요, 원충은 아버지였다. 1358(공민왕 7)에 변안렬은 노복 300구와 말 5천필을 바쳤고, 출장입상(出將入相)해 많은 군공을 세웠다.

10년 동안 숙위 업무에 종사하다가 변안열은 1362(공민왕 11)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공훈(功勳) 2등에 기록되고,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개경을 수복해 공훈 1등의 직첩을 받았으며,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제수받고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에 책봉되었으며, 삼사밀직사사(三司密直司事)에 올랐다.

그런데 1368(공민왕 17)에 주원장(朱元璋)이 양자강 남북을 아우르고, 대도(大都: 북경)를 탈취해 원 순제(順帝)가 상도(上都: 開平府)로 달아났다가 응창(應昌)으로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고려 정부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로 했고, 다음 해(1369)에 변안렬은 홍무(洪武) 연호를 쓸 것을 상소했다. 친원파에서 친명파로 바뀐 것이다. 공민왕의 친명정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명교체기에 기철(奇轍)의 아들 기산첨목아(奇賽帖木兒)가 동령부(東寧府)를 근거로 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고려로서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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