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의 등장과 가야 3 └ 역사일반

481년 신라를 침공한 고구려군이 백제와 가야의 구원병에게 패퇴한 이후 백제-신라의 군사동맹은 더욱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494년 신라의 장군 실죽(實竹)이 고구려군과 살수(薩水) 들판에서 싸우다 패배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나 농성을 하게 되자 백제의 동성왕(東城王)3천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해 주었다. 다음해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하자 이번에는 신라의 소지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구원하도록 했다. 이후에도 공방전은 계속되었지만 고구려의 위협이 이전처럼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백제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면서 부터는 오히려 백제가 공격적으로 나서게 되며 고구려의 반격도 쉽게 격퇴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무령왕은 즉위하자 곧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했으며 다음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그 다음해에는 고구려의 조종을 받은 말갈(靺鞨)이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을 공격해왔지만 5천명을 병력을 보내 물리쳤다. 무령왕 6(506)7(507), 10(510), 12(512) 고목성, 한성(漢城), 가불성(加弗城), 원산성(圓山城) 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백제는 결국 고구려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무령왕 21(521)에는 중국의 양()에 사신을 보내 여러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양나라와) 우호를 통하게 되었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선언을 할만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백제-신라의 상호원조와 백제의 재기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서 고구려의 영향력도 크게 퇴조하기 시작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것이 임나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와 함께 그동안 협조가 잘 되어 오던 백제와 임나 사이도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압력을 받고 있는 동안은 백제로서도 고구려와의 분쟁에 협조가 필요한 만큼 가야의 독립노력을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세력이 퇴조했다는 사실은 이제 백제에게는 임나의 협조가 그다지 시급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작업이 근초고왕 대에 확보했던 백제 세력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백제의 국제적 위신이 걸린 것이기도 했다. 근초고왕 때에, 임나는 물론이고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의 잔여세력들이 백제 세력권으로 흡수되었다. 그런데 백제가 고구려의 압력으로 약화된 틈을 타 이들이 독립을 되찾으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덧글

  • ㄴㅇㄹ 2014/01/08 13:07 # 삭제 답글

    솔까역사가 요즘 여기와서 이런 포스트에 덧글로 헛소리를 안하니 참 좋습니다.
  • ㅋㅋㅋ 2014/01/09 05:26 # 삭제

    이거 뭐여?
    솔까가 그립나?
    솔까가 이거 보고 다시 시작할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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