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사회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또한 양반신분을 유지하는 데는 혼인이 중요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족구성은 양측적 친족(兩側的親族)을 바탕으로 부계와 모계가 동시에 중시된 관계였다. 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이었다. 남귀여가혼이란 남자가 혼인하면 여자 집에 들어가 살다가 아이를 낳은 뒤에 본가로 돌아오는 풍습이다. 이것은 오랜 전통으로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이 일찍부터 혼인하자마자 여자가 시가(媤家)로 오는 친영(親迎)으로 바꾸려 하였으나 좀처럼 바꾸어지지 않았다.

이이(李珥)나 송시열(宋時烈) 같은 명사들이 외가에서 낳아 성장한 것이나 자녀균분상속, 음직(蔭職)에서 사위가 아들손자 다음으로 수혜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응시할 때나 관리를 임명할 때 내는 개인 신상명세서에도 4, 즉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를 적게 되어 있었던 것도 그러한 예가 된다.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친영을 강조하고 가묘(家廟)의 설치와 3년상(三年喪)의 실시를 독려하였으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적인 사회제도는 17세기 이후에 가서야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주자학이론을 토착화시킨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주자학 사상을 바탕으로 양자(養子)제도가 정착되는가 하면, 자녀균분상속이 제사전(祭祀田)의 명목으로 장자에게 상속이 집중되는 관행으로 바뀌어 갔다.

양반들은 성씨(姓氏)를 가지고 있었다. 성씨는 군현(郡縣)이나 촌(), 부곡(部曲)을 본관으로 칭하였다. 그리고 이들 성족(姓族)들은 향촌지배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성씨는 왕족이나 중앙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나말려초(羅末麗初)부터 호족(豪族)들에게 확산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노비를 제외한 양인 이상의 모든 백성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지배권인 향권(鄕權)은 호족의 후예인 향리(鄕吏), 또는 향리에서 배태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가지고 있었다. 고려왕조는 반독립적인 향리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500년을 소비하였다. 이에 조선은 초기부터 향리들을 지방 사역인(地方使役人)으로 격하시키고 그 분만아(分娩兒)인 재지사족을 지방 양반으로 정착시켰다. 향리는 중인(中人)으로 전락한 것이다.

재지사족은 중앙에 출신지역 재경관료들의 모임인 경재소(京在所)를 만들고, 경재소의 지방분소로서 해당 지방에 유향소(留鄕所)를 만들어 향리세력을 누르고 향권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향소 양반들은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해 향촌민을 교화시키고, 향안(鄕案)을 만들어 재지사족과의 결속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향약과 향규(鄕規)의 도덕기준은 자의적이어서 사족 지배를 강요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여기에 위배되면 자체 처벌하거나 또는 중대한 사안인 경우에는 관청의 힘을 빌려 처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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