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사회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조선왕조는 유교의 농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었고, 유교에서는 생산보다 분배에 치중하였다. 이는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고 실리를 도외시해 부국강병에 방해되는 요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모든 권한이 재상에게 집중되었다는 비판이 있어서, 사림정치시대에는 인사권과 언론권이 중하위 양반관료들에게 분할되었다. 전랑(銓郞)이 당하관을 추천할 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이나, 자기의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하는 자대권(自代權), 사관(史官)이 투표로 사간후보자를 뽑는 한림회천권(翰林回薦權), 삼사(三司)의 언론권 강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국대전}에도 없는 일종의 관행이었다. 이러한 사림정치의 틀은 영조 17년에 무너졌다. 그리하여 외척 세도정치의 부패상이 나타나고 나라가 망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양반 가운데에는 벼슬길이 끊어지고 경제력도 없어 몰락양반이 되는 부류도 있었다. 이른바 잔반(殘班)들이다. 박지원의 <양반전>(兩班傳)은 이러한 양반들을 기롱한 것이다. 몰락양반들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평민들과 다름없었다. 반면에 비양반 출신으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편승해 돈을 벌어 양반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을 주고 양반을 사는 납속종량(納粟從良)이 유행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고가 고갈되어 국가에서는 신분제도가 붕괴될 위험이 있는데도 납속을 받아 관직을 파는 경우가 있었다. 공명첩(空名帖)이 그것이다. 족보를 위조해 양반을 사칭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분제도를 붕괴시켜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신분의 벽이 얇아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것은 근대화와 맞물려 신분질서의 변동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신분은 자유민인 양신분(良身分)과 비자유민인 천신분(賤身分)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른바 양천제(良賤制)가 그것이다. 이러한 양천제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양신분 가운데에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양반(兩班), 중인(中人), 양인(良人)의 구분이 있었다. 양반이 되는 요건은 우선 양반 관직에 종사하거나 그 가족이어야 할 것, 또는 유교교양을 갖추거나 가문의 전통이 있어야 하는 것 등이었다. 처음에는 양반관직이 주요한 변수였으나 양반인구가 늘어나자 유교교양을 갖춘 독서인층(讀書人層)이면 양반으로 쳐주었다. 4대 무현관(四代無顯官)이면 양반이 아니라는 관념이 약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들은 가문의 전통을 내세우기 위해 족보(族譜), 종계(宗契), 누정(樓亭), 서원(書院), 비명(碑銘)을 만드는 데 노력하였고, 동족마을을 만들어 집안의 결속을 다지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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