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경제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양반은 지식인이요, 관료요, 지주이기도 하였다. 물론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양반도 있을 수 있으나 양반은 본래 지주였다. 이들은 개간(開墾), 매매(賣買), 사패(賜牌), 기증(寄贈), 투탁(投托), 상속(相續) 등의 방법으로 사유지를 넓혀갔다. 벼슬을 할 경우에는 녹봉(祿俸)과 과전(科田)을 받고, 국가에 공이 있으면 공신전(功臣田), 별사전(別賜田)을 따로 받았다. 그리하여 산천을 경계로 하는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특권적으로 또는 비합법적으로 세금을 감면 받아 결국 국가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하여 토지와 노비의 불법소유를 사찰하고 균분상속제를 만들어 재산의 집적을 방지하였다. 중앙집권체제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양반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노비를 시켜 집안일을 돕게 하거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노비 가운데에는 가내노비(家內奴婢)와 독립해 살면서 몸값[身貢]을 내는 신공노비(身貢奴婢)가 있었다. 가내노비는 양반의 토지를 경작해 주거나 소작(小作)을 할 뿐만 아니라 양반의 사치생활을 보장하는 사치노비가 되었다. 노비에 대한 형살(刑殺)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알게 모르게 피해를 받는 노비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에는 양반 농장의 말음[舍音]이 되어 경제적 부를 축적하거나 위세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노비는 원래 범죄를 저지른 범죄노비나 전쟁포로들로 구성되었으나 정복전쟁이 없어지자 노비의 양산을 위해 노비수모법(奴婢隨母法), 일천즉천(一賤則賤)이라는 가혹한 법을 만들었다. 노비의 자식은 대대로 노비가 되게 하는 악법이었다. 노비는 짐승처럼 어머니의 상전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남자종[]이 양인여자[良女]에게 장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은 불법으로 자기의 남자 종과 양인여자를 혼인시켜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노비를 늘려갔다. 국가에서는 노비변정사업(奴婢辨正事業)으로 양반의 불법적인 노비증식을 규제하였으나 노비는 날로 늘어만 갔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간헐적으로 실시해 노비인구를 조절하였다. 이는 주로 양반의 비첩산(婢妾産)을 속량(贖良)하는 선에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40이 되도록 정실에 소산이 없는 양인의 비첩산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양반은 비록 일은 하지 않았지만 농업에 종사해야 하였고, 상공업을 해서는 안 되었다. 무본억말(務本抑末)정책 때문이었다. 도덕적 수양을 쌓아야 하는 양반들이 이윤추구에 물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반은 토지를 매매할 때는 노비의 이름으로 하거나 장사를 해도 노비를 내세워 하였다. 이처럼 양반이 놀고먹는 것은 국가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기에 실학자 박제가는 양반을 통역이나 장사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덧글

  • 솔까역사 2013/11/29 10:39 # 답글

    이런 비인간적인 역사에서 멀지 않은 근대 한국에서 만민평등의 이상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혹하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요. 건국전후사는 당시의 기준으로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야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이 분명하지만요.
  • 블레이드 2013/11/30 08:19 #

    이 작자는 한국 전근대사만 비인간적인 줄 아나보군.
  • 솔까역사 2013/11/30 09:27 #

    공산화는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죠.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