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교육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특히 향교의 생도인 교생(校生)은 대부분 비양반자제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고, 천거(薦擧)를 통해 역학생(譯學生), 의생(醫生), 율생(律生) 등 중인(中人)직이나 미관말직이나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생이 되는 것을 선호하였다. 양반자제들도 실제로 출석은 하지 않았지만 양반생도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 등록은 하였다. 과거시험을 치려면 학적(學籍)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학 가운데 중앙관료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4학은 좀 나았다.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본래 생원진사시를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들은 승보시(陞補試)를 거쳐 성균관(成均館) 기재(寄齋)에 들어가 생원진사시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생원과 진사가 된 사람은 성균관에 들어가 출석성적[圓點] 300을 딸 때까지 문과시험 공부를 하였다. 입학과 졸업은 없으며, 300일을 출석하면 문과초시(文科初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양반들의 요구에 따라 3년마다 보이는 식년시(式年試) 이외에 특별시험인 별시(別試)가 늘어나자 출석성적도 감해주거나 면제해 주는 경향이 생겼다. 그럼에도 성균관의 시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양반들은 직접 다니지 않고 종들로 하여금 대리출석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성균관도 시골 학생들로 채워지거나 과거시험이 있기 직전에만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

행정실무나 기술교육은 담당기관에서 실시하였다. 이들은 잡과에 응시하였다. 무과는 문과보다 쉬워 양반자제들이 몰렸을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만 명 이상 뽑는 무과의 만과(萬科) 같은 경우에는 합격을 해도 꼭 벼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문과무과잡과에 합격하면 벼슬길이 열리는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이 가운데 문과는 귀하고 무과와 잡과는 천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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