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양반문화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 양반과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은 양반의 전유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시의 교육이라면 유교 교육을 뜻한다.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경전과 문명스러운 삶을 구가하는 시문(詩文), 선험적인 선례인 역사가 유교 교육의 3대 요소였다.

조선시대는 도덕사회였으므로 성인(聖人)의 가르침인 유교경전이 중시되었다. 도덕적 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은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은 문치주의(文治主義)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문은 양반들의 교양이요 상식이었으며, 문명스러운 삶을 사는 도구이기도 하였다. 시문은 언문(諺文)으로 짓는 수도 있지만 한문으로 짓는 한시(漢詩)가 일반적이었다. 한문이 어렵기 때문에 시문은 양반귀족들의 독점물이었다. 한편 문치주의 유교국가에서는 정통이 중요하고 선례가 중요하였다. 무력으로 귀결 짓는 무치주의 국가와는 달리 문치주의 국가에서는 선왕의 준례를 따라야 하였다. 그래서 모든 통치행위를 기록으로 남기고, 이 기록의 축적인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정치를 타개해 나갔다.

양반자제들은 다섯 살이 되면 이미 한문의 초학교과서(初學敎科書){천자문}(千字文), {유합}(類合), {동몽선습}(童蒙先習), {사략}(史略), {소학}(小學) 등을 익혔다. 초학교육은 가족이나 친족들을 모은 가숙(家塾)에서 이루어졌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절간 같은 데서 하과(夏課)라 하여 시문을 학습하였다.

여덟 살이 되면 원칙적으로 향교(鄕校)4(四學), 서당(書堂)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향교와 4학은 관립학교요, 서당이나 서재(書齋)는 사립학교였다. 그러나 양반자제들은 관립학교에 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양반들의 특권적인 교육기관인 사립학교에 가서 훌륭한 선생의 교육을 받기를 원하였다. 국가도 모든 비용을 지원해야 하는 향교교육 대신 개별적으로 경비를 조달하는 사립학교에 교육을 의존하고자 하였다. 농업국가로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던 조선으로서는 늘 국고가 넉넉지 못하기 때문에 국립학교는 부실하였다. 훌륭한 선생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설도 열악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의 전통이 강하였다. 공립학교에는 양반 아닌 일반 평민이 정규학생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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