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조명 연합군의 반격과 화의론(和議論) 대두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육지에서는 의병이 봉기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명나라 원병이 참전함으로써 반전의 기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조승훈의 1차 원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전했지만 명나라 개입 자체가 왜군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59212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43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바로 2차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전열을 정비한 이여송은 1593128일 순변사 이일, 휴정이 지휘하는 승병과 합세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연합군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왜군은 성안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혈전의 결과로 평양성을 탈환한 것이다. 이는 실로 반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여송은 왜군을 지나치게 경시한 나머지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가 꺾인 이여송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개성으로 회군했다. 조선에서 누차에 걸쳐 공격을 종용했지만 응하지 않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왜군은 평양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의 승리로 다소나마 기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전라감사 권율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왜군은 행주산성을 포위해 맹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행주산성에서의 응집력은 대단했다. 민관군은 권율을 중심으로 결집해 총력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전사에 빛나는 행주대첩이 바로 이것이다.

이 무렵을 전후해 보다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이 화의론, 즉 강화 협상이었다. 당초 화의론은 왜장 고니시에 의해 두 차례 제기된 바 있었고, 명나라의 1차 원군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거론되었다.

마침 조승훈이 패전하자 명나라에서도 화의에 긍정적으로 임했다. 이에 명나라 대표 심유경(沈惟敬)이 평양에 와서 고니시와 강화 조건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명나라에서 2차 원병을 보냄으로써 외형적으로는 화의가 결렬된 셈이었다.

 


덧글

  • 零丁洋 2013/10/22 21:07 # 답글

    당시 의주 주변의 창의군 규모와 성격은 무엇인가요?
  • 블레이드 2013/10/23 06:56 #

    구체적인 문제는 조선시대전공자에게 물어봐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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