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의 군주 -효종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북경에서 머물 때 청나라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소현세자와 효종에게 주었으나 효종은 받지 않았다. 그는 포로로 잡혀온 우리 나라 사람들을 대신 돌려주기를 바란다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며 허락했다. 조선으로 돌아 오면서도 그 행장이 매우 검소해 연도에서 이를 본 백성들이 칭찬해 마지 않았다. 관상쟁이의 말대로 그는 참으로 임금 노릇할 사람이었다.

청나라에서의 시련은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부터는 그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어 버리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는 조정의 배청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평생을 북벌에 집념한 보람도 없이 국제정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이를 뒷받침할 재정마저 부족했다. 이 때문에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보다 현실적인 경제재건이 우선임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잦은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효종은 또한 어진이를 존경하고 예우하는 것이 지극했다.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전 참의 김집전 지평 송준길송시열등을 비롯하여 권시이유태 등을 조정으로 불러 들였다. 그들은 인조 때에는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초야의 학자들이었다. 효종은 또 두 차례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효종은 역시 종통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왕이었다. 재위시 황해감사 김홍욱은 상소를 올려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거론한 일이 있었다. 강빈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면 왕가의 맥은 그 셋째 아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를 형국이었다. 그것은 효종의 재위명분을 잃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효종은 격분하여 그를 죽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효종의 종통상의 하자는 결국 현종조 두 차례에 걸친 예송을 초래하게 된다.

효종은 165954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이며 묘호는 효종이었다. 능호는 영릉(寧陵)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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