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여인 강빈의 죽음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에 독약이 들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인조는 강빈을 지목하여 5명의 강빈의 나인과 음식을 만든 3명의 나인을 잡아 국문했다. 그러나 실상 인조가 그 이전부터 이미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왕래가 끊긴지 오래였다. 음식에 독을 넣는다는 것은 형세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조와 조소용의 모함이었다.

이 사건은 끝내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이후에도 계속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여 강경하게 법으로 처벌하고자 했다. 인조는 23일 김류이경석최명길김육김자점 등 대신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 적의(紅錦翟衣-붉은 비단으로 만든 왕후의 옷)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했다. 또 지난 해 가을에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큰소리로 발악하고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도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의 사이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에 명하여 처벌하도록 하라.(인조실록47, 인조 2423)

김류 등은 놀라 서로를 쳐다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왕의 처사가 지나침을 간하였으나 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인조는 요순을 본받고자 하면 조종을 본받아야 한다며 연산군의 어머니를 폐출한 뒤 후환을 염려하여 사사한 것을 예로 들기까지 했다.

김자점은 이 때에도 임금의 독단을 옳다고 하면서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반면 최명길이경석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그녀의 죄가 비록 크지만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강빈의 형제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곤장을 맞아 죽게 되었다. 315일에는 마침내 강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강빈의 친정은 멸문의 화를 입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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