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여인 강빈의 죽음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법도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다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왕위 계승자의 지위에 있던 사람이 즉위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 종말은 좋지 못했다. 남편을 잃고 자식의 세자 자격조차 빼앗겨 상심에 싸인 강빈이 그 이치를 모를 리 없었다.

강빈과 원손의 존재 자체는 왕에게 큰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원종추숭에서도 보았듯이 정통성 확보와 수호에 인조만큼 예민하고 용의주도한 왕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는 화의 근원을 미리 제거하고자 했다.

강빈을 포함한 그 일족들을 흔단이 있기 전에 미리 조처해야 한다는 왕의 입장은 소현세자가 죽던 바로 그 해(1645) 8월에 처음으로 표출되었다.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지만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저 여러 강씨들이 모두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니, 그들을 먼 데로 이주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인조실록46, 인조 23825)

김류이경석등은 그들이 망령되게 행동한 일이 있기는 하나 특별히 드러난 죄악은 없으므로 함부로 죄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인조는 흔단이 생기기 전에 선처하는 것이라는 명목으로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양보냈다. 강빈에게 이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자기에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복받치는 설움을 누를 길 없어 인조의 거실 근처로 가서 통곡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1646(인조 24) 13일에 일어났던 전복구이사건은 강빈을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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