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전쟁의 징조와 통신사파견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야심가가 출현해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했다. 이에 태양의 아들을 자처한 도요토미는 점차 과대망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의 이름을 동양 3국에 떨치는 것이 소원이다.”는 언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이러한 도요토미의 성향은 곧바로 대륙 출병의 야욕으로 표출되었다. 공명심과 정복욕에 도요토미를 자극한 것은 제후들에게 분배할 영지의 필요성이었다. 이는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강화하는 한편 신흥 세력의 성장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던 도요토미의 본심과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1586년 규슈 지방까지 제패한 도요토미는 더욱 기고만장해 주변 국가의 국왕들에게 입조를 독촉했다. 여기에는 명나라와 조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력을 앞세운 도요토미의 오만 앞에 국제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8911월 조선에서는 통신사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의 상황과 도요토미의 본심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사는 서인 황윤길(黃允吉), 부사는 동인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은 동인 허성(許筬)이었다.

1590(선조 23) 6월 대마도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주가 말을 탄 채로 조선의 사신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이미 전운을 감지했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 국왕의 도서(圖署, 출입국증명서)를 받는 경제적인 속방이었기 때문이다.

7월경 일본의 수도 교토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무려 4개월을 기다렸다. 동북 지방에 정벌을 나섰던 도요토미가 돌아온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때 도요토미는 통신사 일행을 자신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복속 사절로 오인하고 있었다.

통신사의 눈에 비친 도요토미는 한마디로 무례한 권력자였다. 그는 통신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본심을 감추는 데 부심했다. 국빈을 영접하는 엄숙한 자리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침략의 야욕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예의와 위엄을 상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도요토미의 이 모든 위장술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일행은 그의 침략 의도를 나름대로 간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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