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모반 사건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효종이 즉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622, 양사에서는 김자점의 죄목을 들어 파직을 청했다.

영의정 김자점은 본래 보잘것없는 작은 인물로서 외람되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은택을 입은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 공훈과 존귀함을 믿고서 사치와 방자를 멋대로 해 선왕께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린 죄 진실로 큽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효종실록 권1, 효종 즉위년 6월 경술

양사가 죄명을 누차 보태어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했다. 왕은 이를 따르지 않다가 1650(효종 1) 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를 홍천현으로 유배보냈다. 624일에는 사헌부가 원두표를 분당의 책임을 들어 파직하기를 아뢰었다. 원두표는 그 자신이 이미 붕당의 폐해를 지적한 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원당(原黨)의 영수였으니 분당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로써 인조 때에 권세를 다투던 낙당(洛黨)의 김자점과 원당(原黨)의 원두표는 왕이 바뀐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정치 세력의 판도도 크게 바뀌어 8월에 이경석, 정태화, 조익이 삼정승이 되었고 김상헌이 영돈녕부사, 김집이 대사헌, 송준길이 장령, 송시열이 진선이 되었다. 이렇게 정계의 주요 요직에는 대체로 남인과 전날의 청서(산당한당)가 대거 중용되었다.

그러나 그때 쫓겨난 김자점은 멀리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반정 일등공신일 뿐 아니라 근 30년 동안 정권의 실력자이기도 했던 그가 쉽게 물러설 리 만무했다. 김자점과 그의 아들들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우리 임금이 구신을 몰아내고 산림 인사들을 등용해 북벌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청에 밀고하도록 했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여섯 명의 사자를 보내 조사에 착수했다.

처음 그들은 조선에서 인조가 죽은 뒤 김자점을 몰아낸 사람들이 누구이며 일본을 핑계로 성지의 수축 및 병기의 정비를 서두른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돌연 변심한 이형장이 청국 사신들에게 오히려 김자점의 죄를 극론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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