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정통성문제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효종은 또한 어진 이를 존경하고 예우하는 것이 지극했다.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전 참의 김집, 전 지평 송준길, 송시열 등을 비롯해 권시, 이유태 등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인조 때에는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초야의 학자들이었다. 효종은 또 두 차례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1652(효종 3)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효종은 역시 종통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왕이었다. 재위 시 황해감사 김홍욱은 상소를 올려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거론한 일이 있었다. 강빈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면 왕가의 맥은 그 셋째 아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를 형국이었다. 그것은 효종의 재위 명분을 잃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효종은 격분해 그를 죽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효종의 종통상의 하자는 결국 현종 조 두 차례에 걸친 예송을 초래하게 된다.

사계 문하의 동문이라는 강한 학문적 연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호서 산림은 인조를 거쳐 효종 조에 이르러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효종이 북벌의 동반자로 산림 세력을 지목함으로써 그 위상이 현저하게 격상되는 가운데 김자점, 원두표, 이후원 등 훈구 대신들까지 이들의 등용을 주선함으로써 이제 산림의 진출은 시대적인 요구처럼 보였다. 정치와 권력의 진상은 그 이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효종이 산림을 북벌의 동반자로 지목한 반면 훈구 대신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집권 명분을 강화하고자 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조 조의 서인이 공서(功西, 훈서)와 청서(淸西)로 양분되었다면 효종 조의 서인은 낙당(洛黨), 원당(原黨), 한당, 산당으로 4분되어 있었다. 낙당과 원당은 반정의 원훈 김자점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결성된 당파로서 훈구 세력을 대표했다. 여기에 비해 한당과 산당은 김육과 김집을 당주로 해 결성된 당파로서 신진 세력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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