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행적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효종은 어려서부터 기국과 도량이 활달했는데 장난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행실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타고난 천성이 효성스러워 채소나 과일 같은 하찮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먼저 아버지에게 올린 뒤에야 먹곤 했다. 인조가 항상 효자라고 칭찬해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

1636(인조 14)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효종은 직접 결사대를 조직해 청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강화도 함락으로 인해 삼전도에서 아버지 인조가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 보아야 했다.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1637(인조 15)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 등과 함께 청나라에 들어가 8년간의 인질 생활을 시작했다. 감시와 통제의 연속이었던 심양 볼모 생활이었지만 한 집에 거처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는 소현세자의 보호를 자처하고 나섰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을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기도 했다. 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해 그를 보호했다. 효종은 인질 생활의 고통과 비애를 술과 시로 달래기도 했다.

북경에서 머물 때 청나라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소현세자와 효종에게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받지 않았다. 그가 포로로 잡혀 온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신 돌려주기를 바란다.”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며 허락했다. 조선으로 돌아오면서도 그 행장이 매우 검소해 연도에서 이를 본 백성들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관상쟁이의 말대로 그는 참으로 임금 노릇할 사람이었다.

청나라에서의 시련은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복수 설치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는 조정의 배청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평생을 북벌에 집념한 보람도 없이 국제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이를 뒷받침할 재정마저 부족해졌다. 이 때문에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보다 현실적인 경제 재건이 우선임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잦은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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