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당의 전쟁 └ 역사일반

많은 대신들이 수()가 겪었던 사례를 들어 고구려 정벌에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를 물리치고 침공을 강행했다. 결국 64410, 연개소문의 반역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 침공 준비가 개시되었다.

6447월 당은 요동을 먼저 공격해서 형세를 살핀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 중간이었던 9월 연개소문이 조공품으로 백금을 바치며, ‘관인(官人) 50명을 들여보내 숙위하게 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고 있던 당 태종은 이 성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해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과 거란 등 다른 이민족 군대도 동원했다.

전쟁 초기 당은 일단 기세를 올렸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당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도중에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의 부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던 중, 이세적의 구원군까지 도착해 격퇴되었다.

당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켰다. 그 뒤 백암성(白巖城)은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의 내통으로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은 빼앗은 개모성을 개주(蓋州), 요동성을 요주(遼州),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편했다.

백암성이 함락된 후 당 측에서는 이후 전략을 두고 약간의 고민을 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安市城)을 우회하려 했으나, 보급로 차단이 염려된다는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 공략에 나섰다. 고구려에서는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해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 부대조차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덧글

  • 솔까역사 2013/07/17 18:49 # 답글

    김정일은 연개소문과 고려를 이렇게 평가했죠.

    "참으로 고구려는 삼국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나라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신라와 당나라 통치배들의 침략책동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
    고구려 인민들은 70년 동안이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규모적이고 집요한 침략을 격퇴하고 나라의 존엄과 독립을 지켜냈다. 고구려의 군대와 인민들은 을지문덕장군의 지휘밑에 300만에 달하는 수나라침략군을 격멸소탕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지휘 밑에 당나라의 침략과 압력을 짓부셔버렸다."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brd=20&g_thrd=1822

    이런 김정일사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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