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즉위과정 3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대부분의 신료들이 그와 입장을 같이했다. 그러나 김자점은 왕의 비위를 맞추어 속히 두 대군 중에서 세자를 결정하도록 부추겼다. 김류 또한 임금의 뜻을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말로 영합했다. 또 강경한 태도의 인조에 대해 처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여러 대신들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뜻을 확고히 하지 못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인조는 다음과 같이 결정해 통보했다.

 

불행하여 자식들이 다 죽고 둘만 남아 있으니, 그중에 나은 사람을 가려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청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국본(國本)을 물을 것이다. 두 사람이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지만 나는 그중에 장자를 세우고자 한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노라.

인조실록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법도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다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왕위 계승자 지위에 있던 사람이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 종말은 좋지 못했다. 남편을 잃고 자식의 세자 자격조차 빼앗겨 상심에 싸인 강빈이 그 이치를 모를 리 없었다.

강빈과 원손의 존재 자체는 왕에게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원종 추숭에서도 보았듯이 정통성 확보와 수호에 인조만큼 예민하고 용의주도한 왕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는 화의 근원을 미리 제거하고자 했다.

강빈을 포함한 그 일족들을 흔단이 있기 전에 미리 조처해야 한다는 왕의 입장은 소현세자가 죽던 바로 그해(1645) 8월에 처음으로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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