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빈의 죽음 3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함께 자리한 대신들은 왕의 처사가 지나침을 간했으나, 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심지어 인조는 연산군의 어머니를 폐출한 뒤 후한을 염려해 사사한 일을 예로 들기까지 했다.

김자점은 이때에도 임금의 독단을 옳다고 하면서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반면 최명길·이경석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그녀의 죄가 비록 크지만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강빈의 형제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곤장을 맞아 죽었다. 강빈의 친정도 멸문의 화를 입게 된 것이다. 315일에는 마침내 강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강빈의 죽음은 1차적으로 평소 그녀에 대한 인조의 불신과 증오가 축적된 결과였다. 실제로 강빈 스스로가 지은 허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강빈의 죄상은 인조가 그녀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조는 새로이 세자로 책봉된 봉림대군의 왕위 계승권 행사에 어떠한 장애나 위험 요소도 사전에 제거했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여론은 국본이 정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원손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일을 더욱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조의 무리수 때문에 효종 즉위 직후부터 강빈 신원 논의와 함께 강빈옥사에 대한 강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효종은 강빈옥에 대해 재론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특별 하교까지 내렸다. 그러나 1654(효종 5) 7, 당시 황해감사였던 김홍욱이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을 하여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격분한 효종은 그를 장살시켰고,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강빈옥사를 둘러싼 의혹이 여전히 제기되어, 결국 1718(숙종 44)에 이르러 강빈은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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