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빈의 죽음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소현세자가 죽은지 40일 만인 1645(인조23) 62일에 후사를 바꾸려는 의논이 일어났다.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을 비롯해 김자점 이덕형 이경석 정태화 김육(金堉) 16명의 대신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에게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이따금 심해지고 원손(소현세자의 장남 석철, 당시 11)은 저렇듯 어리니, 내가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원손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두 대군(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중에 선택해 세자로 세우고자 한다. (인조실록46, 236월 계축)

 

소현세자의 아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두 아우들 중에서 세자를 정하고자 했다. 이에 홍서봉은 세자가 없으면 세손으로 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변칙적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대부분의 신료들이 그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왕의 의중을 알아채고 속히 두 대군 중에서 세자를 결정하도록 부추겼다. 김류 또한 임금의 뜻에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말로 영합했다. 당초 인조의 생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던 여러 대신들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뜻을 굽히고 말았다. 이에 인조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모두 취하고 버릴것도 없이 용렬하지만, 그 중에서 형인 봉림대군을 국본으로 삼겠노라고 결정했다.

결국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하는 원칙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자,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과 그 알들의 존재가 인조에게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원종 추숭의 전례에서도 보았듯이 정통성 확보와 수호에 인조만큼 예민하고 용의주도한 왕도 드물었다. 그런 만큼 인조는 또 다른 화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한 특단의 조처를 강구했다. 역대 왕위 계승자의 지위에 있던 사람이 밀려나게 되면, 그 종말은 으레 비극으로 끝나곤 했다. 남편을 잃고 자신의 왕위계승권조차 빼앗겨 상심에 싸인 강빈이 그 이치를 모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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