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와 인조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637(인조 15) 130, 이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의식을 거행한 바로 그 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군의 진영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그 해 28일에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鳳林大君), 그리고 여러수행 관원들과 함께 조선의 인질로 심양으로 잡혀 갔다.

한나라 무제 때 소무(蘇武)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흉노 땅에 가서 잡히게 된 후 열아홉 해 동안 끝내 흉노에 굴하지 않은 열사였다. 인조는 친히 서울 교외까지 전송나가 소현세자에게 소무와 같이 수절하여 절대 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질 생활이 9, 소현세자는 1645(인조 23)가까스로 조선 땅을 다시금 밟을 수 있었지만, 귀국 2달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소현세자는 1612(광해군 4) 1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인조5) 12월에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병자호란 후 정축맹약에 따라 청의 인질로 끌려갔던 것이다.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심양관소, 즉 심관(瀋館)에 거처했다. 심관은 양국간의 연락 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그리고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이었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조선 대사와도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소현세자는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진취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심양으로 인질이 되어 가기 전부터 서양의 화포나 자명종, 천문기기와 같은 새로이 전래된 서양 과학 문물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는 특히 역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후에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가끔 유럽인이 주관하는 천문대에도 찾아갔고, 또 당시 북경에 와 있던 아담 샬(Adam Schall)과도 교섭을 가졌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에게 직접 한역한 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와 여지구(與地球)를 주었고 천주상까지 선사했다고 한다. 이렇듯 서양 문물에 대한 소현세자의 호의적 태도 때문에, 그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근대화가 좀 더 빨리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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