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사비성이 함락되었다고 백제가 바로 망한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부흥운동이 일어나 신라와 당은 대부분의 백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660년 8월 경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던 부흥운동의 기세는 두 달도 못되어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사실상 역으로 포위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물론 이는 삼년산성까지 철수했던 신라군이 구원에 나섬으로서 해결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와 당은 곤경에 빠졌다.
661년에 접어들면서 백제 부흥군의 사비 공략이 거세어지자, 이를 진압하려 나섰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당나라 군사 1천명이 전멸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661년 초에는 백제 옛 땅의 남쪽 방면을 제외한 지역이 부흥운동군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이와 같이 제법 컸고, 비교적 오래갔다. 661년에는 사비성 공략에도 실패하고 백강으로 올라오려던 왜군과의 연합작전도 실패하였다. 그런데도 백제부흥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라 구원병을 대파하여 백제 옛 땅 거의 전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유리하게 진행되던 전황을 믿고 부흥운동을 지휘하던 도침은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굴욕을 느낄만한 말까지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다음 기록이 그 상황을 보여준다.
인궤가 글월을 지어 화와 복을 자세히 말하고 사자를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객관에 두고 업신여기면서 대답하였다.
“사자의 관등이 낮다. 나는 바로 일국의 대장이니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
[도침은] 서한에 답하지 않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 2013/05/18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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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부여풍에게 민심이 있었다고 보면 부여풍이 고려로 도피한 663년까지 왕조가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웅진천도도 실제로는 천도라기 보다는 복국으로 봐야함
심지어 김일성이도 서울함락시켰으니 전쟁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네
사비함락이 백제멸망이 아니라는 것은
이거야 말로 현대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것에 불과함
하긴 뭐
웅진도독부가 소멸된 시기까지를 백제존속기로 보는 이도학 교수의 책보고 공부하고 책쓰신 솜씨니 어련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