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을 무시한 핵심인물은 송시열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기해년에도 현종은 송시열의 설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이 전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들이 이미 국제라고 한데다가 송시열이 사림의 중망을 받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민신 대복 사건에서는 현종뿐만 아니라 평소 송시열을 믿고 존경하던 자들도 대부분 송시열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현종은 즉위 초에는 효종과 송시열의 관계를 생각하여 온갖 예우를 다해 그를 초빙했다. 그러나 현종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는 고압적이고 비협조적인데다 멸시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는 거의 재야에만 머무르면서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현종과는 더불어 국사를 논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공공연하게 현종을 비하하는 말도 했다. 덕이 부족하다는 둥,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사람만 등용한다는 둥, 곳간의 쌀가마니까지 손수 헤아린다는 둥 왕의 인품을 여지없이 깎아 내렸다.

현종도 말년에 이르러 서서히 송시열 일파의 집권 서인들에게 불만과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송시열에 대한 존경과 예우도 점점 식어 갔다. 왕과 송시열 사이의 상호 불신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공론을 좌우하며 왕권을 견제하는 데 대한 현종의 불만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더욱이 이미 중국에서는 군약신강이라는 말까지 유포되고 있었다. 현종이 내가 뇌성병력이 내려치듯 하시던 선왕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근일 조정이 선조(先朝)와 같지 못하다며 탄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인 정권에 대한 현종의 불신과 불만은 자연스레 남인의 등용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민신의 대복 사건과 같은 일로 송시열과 국구 김우명 사이에 심한 갈등이 빚어졌고, 현종의 의중을 읽은 청풍 김씨 일가는 송시열 견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김석주는 남인 중 유일하게 재상직에 올라 있던 허적과 인평대군 세 아들[三福, 福昌君, 福善君,, 福平君] 및 그의 처가인 동복(同福) 오씨(吳氏) 일문과 손을 잡았다.

갑인예송은 바로 이들이 송시열 당을 견제하기 시작할 무렵에 터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갑인예송으로 송시열계 서인 세력이 곧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 세력이 워낙 뿌리가 깊었다. 서인에서 남인으로의 정권 교체는 숙종 초를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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