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말년의 서인 숙청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현종은 다시 김수흥에게 도신징의 상소문을 읽게 하고, 기해 복제가 차장자복(次長子服)을 적용한 것인가고 물었다. 이에 승지 김석주는 송시열이 효종대왕을 인조의 서자라고 해도 괜찮다고 말해 허목이 이의를 제기했던 사실을 환기시켰다.

김석주는 같은 서인이지만 송시열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의 청풍 김씨 일가가 송시열의 견제로 불이익을 많이 받아온 터였기 때문이다. 김석주는 차제에 그렇잖아도 송시열에게 유감을 품고 있던 현종을 자극시키고자 했다.

현종은 예조판서 조형의 실수를 준엄하게 꾸짖고 대신회의에서 이 문제를 재차 논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기해 복제가 정해진 내력만을 보고할 뿐이었다. 그들은 9개월복이 옳다고 여기는 데 변함이 없었다. 현종은 다시금 9개월복이 옳다고 여기는 데 변함이 없었다. 현종은 다시금 9개월복이 잘못 정해진 것임을 지적하고, 김석주에게 의례주소를 조목조목 해설하여 올리라고 했다.

김석주는 스스로 공평하게 해설했다고 하면서도 서자를 허목과 같이 첩자로 해석하여 송시열의 주장을 은근히 비판했다. 현종은 대통을 이은 중자는 장자가 된다는 조항을 경국대전에 보완하는 방안을 도출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틀 동안 네 차례에 걸친 빈청회의를 통해 현종은 중자가 승통(承統)하면 장자가 된다는 결의를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왕의 직권으로 1년복을 선포해 버렸다. 그리하여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온 지 10일 만에 인선왕후를 위한 조대비의 복제는 1년복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종은 이미 1년복으로 확정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이론 공부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인선왕후 초상 때 예조가 조대비의 복제를 1년에서 9개월로 바꾼것을 트집 잡아, 기해예송 때 서인의 압력으로 달성하지 못한 자신과 부모의 정통성을 확립해 냈다.

현종은 복제를 바로잡은 그 날로 초상 때의 예관(禮官)이었던 예조판서 조형, 참판 김익경, 참의 홍주국, 정랑 임이도 등을 옥에 가두었다. 또 그 다음날에는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에 유배시켰다. 조신들의 반발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반발하는 서인 관료들을 속속 처벌했다.

그럼에도 반발이 계속되자, 현종은 서인 세력을 몰아내고 남인 세력을 끌어들였다. 이하진(李夏鎭) 이옥(李沃) 권대운 민암(閔黯) 목내선(睦來善) 등의 남인을 요직에 대거 기용했다. 반면에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조형 김익경 김만기 홍처량 강백년(姜栢年) 등의 서인은 관직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렇듯 현종은 외척 김석주의 도움을 받아 1674729일 서인을 숙청하고 독단적으로 1년복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사흘 뒤인 81, 1년복으로 성복하고 종묘에 고유(告由, 사유를 들어 고함)했다.

이 때의 복제 개정에 남인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없었다. 윤선도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 있었고, 윤휴·허목 등기해 예송에 참여했던 예론의 대가들조차도 별다른 간여를 하지 않았다. 서인인 정태화·권시·송준길도 이미 죽고 없었고, 송시열도 나서지 않았다. 갑인예송 당시 끝까지 9개월복을 주장했던 이들은 송시열의 일파인 김수항 김수홍 민유중 조형 김익경 김만기 홍처량 강백년 등이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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