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말년의 서인 숙청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76, 조대비의 복제가 잘못 정해졌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경상도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는 기해예송 당시의 조대비 복제는 장자복이었고 따라서 인선왕후를 위해서도 장부복(長婦服)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효종상에 대왕대비 복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장자복인 1년복으로 정해졌는데 인선왕후상에 9월복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2) 장부복(長婦服)9월복으로 정한 것은, 의례(의례)에 따랐다고 하지만, 주자가례(朱子家禮)에는 장부복은 1년복으로 되어 있는데, 구태여 3(三代)의 고례(古禮)를 따른 까닭은 무엇인가?

3) 인선왕후를 중자부(衆子婦)로 본다면 현종은 중서손(衆庶孫)으로서 적장손(嫡長孫)이 될 수 없는데, 고금에 대통(大統)을 이어 종사(宗社)의 주인이 되고도 적장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현종개수실록 권 28, 157월 무진)

 

이에 예송 논쟁이 또다시 불붙게 되었다.실제로 경국대전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장 중장 구별없이 1년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해서 장자부(長子婦)의 경우는 1년복을, 중자부(衆子婦)의 경우는 9개월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들을 위해서는 장 중자를 구별하지 않으면서 며느리를 위해서는 장·중자부를 구별했던 것이다.
일찍이 송시열은 효종대왕은 인조의 서자라 해도 괜찮다고 했다. 현종은 내심 불쾌하게 생각했다. 송시열의 한 마디는 부왕인 효종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마저 위태롭게 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인은 이 말을 빌미로 현종을 분발시켜 정국을 뒤집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도신징의 상소는 바로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도신징의 상소는 복제 시비의 금령 때문에 왕에게 올려지지 않았다. 도신징은 기해예송에 대해서는 금령이 내려졌지만, 갑인예송에 대해서는 금령이 내려진 바 없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의 상소는 왕에게 올려졌다. 현종은 병풍에 영남 유생 도신징이라고 써 놓을 정도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현종은 그 상소문을 7일이나 가지고 있다가 비변사 제신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거론했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에게 인선왕후상에 대왕대비 복제를 바꾼 까닭을 다시 캐물었다. 김수흥(金壽興)은 조대비의 복제를 바꾼 것은 앞서 효종상에 대왕대비를 복제를 1년복으로 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효종상에서의 대왕대비 복제는 중자복을 적용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기해년 복제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고 따져 물었다. 김수흥은 당시 영의정 정태화가 경국대전에 따라 1년복으로 정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기해 복제는 경국대전에 근거한 것이 된다. 그런데 김수홍과 민유중(閔維重)은 기해 복제가 경국대전과 고례(古禮)를 함께 참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시열의 4종설이 참작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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